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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한 맺힌 이의 장서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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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말이었던가 대학원 초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때는 인사동의 고서점이나 인터넷 경매 등을 기웃거리며 고서를 들여다보곤 했었다. 그야말로 책에서나 보던 고서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도 보고,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다는 데 매료되었다. 물론 학생의 주머니 사정이라는 게 뻔해서 제대로 된 걸 살 수는 없었지만, 어쩌다 한 권 두 권을 사서 돌아오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 중국판 《문선》도 그 시절 인터넷에서 구한 책이다. 사진으로는 지금까지 보던 조선 책과는 어째 다르다 싶어 신기했고 주인이 붙인 가격도 싸서(액수는 잊어버렸다) 구했는데, 들이고 나서 찾아보니 명말 청초의 그 유명한 급고각 판본이었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낙장도 있어 선본은 아니었지만, 어렸던 나로서는 횡재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지는 능화무늬가 또렷하여 아마 조선에서 고쳤지 싶은데, 옛 주인이 꽤 아껴 읽은 듯 곱게 세월의 흔적이 내려 있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큼지막한 장서인이 나타난다. 향로 모양의 '청진', 음각의 '함종', 양각의 '어유호인', 다시 음각의 '양오'다. '청진'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의 옛 주인이 함종 어씨였고 그 성명이 '어유호'였음은 알 수 있다.

'양오'는 아마 이 사람의 자일텐데 《맹자》의 "양오호연지기"에서 따왔으리라. 도장의 각법이 18세기 밑으로는 내려오지 않아보인다.

어씨의 '유'자 항렬로 당장 떠오르는 인물은 경종 임금의 장인 어유구(1675-1740)인데, 그의 일족이었을지? 이 정도 도장을 썼던 이라면 제법 부유한 양반이었으려니 하고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록에서 '어유호' 이름 석 자를 찾았다.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1724) 12월 19일 기사다.

진사(進士) 정진교(鄭震僑), 생원(生員) 정최령(鄭最寧), 유학(幼學) 이정화(李正華)ㆍ어유호(魚有浩), 진사 이정언(李廷彦), 생원 이집일(李集一), 진사 송수옹(宋秀雍)ㆍ정린(鄭璘), 유학 이만년(李萬年), ......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 저 군국(軍國)의 기무는 묘당(廟堂)에서 말하고, 백관의 득실은 대각(臺閣)에서 진달하고, 생민(生民)의 질고는 수령과 도백(道伯)이 아뢰고, 사문(斯文)의 시비는 사림(士林)이 변론합니다. 각기 그 직분을 수행하여 크고 작은 일에 빠뜨림이 없는데, 신들이 수백 년 동안 폐고(廢錮)당하여 억울한 사정이 있는데도 신원되지 못하고 있는 일은 바로 곤궁한 사람이 원통함을 품고 있는 첫 번째 일입니다. 그러나 한쪽에 제쳐 놓고 한 번도 성상께 진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원통함을 품고 한(恨)을 가슴속에 두고 있어도 성상께 알릴 길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뜻을 억누른 채 그 심정을 글로 썼다가 지우기만 하였을 뿐이니, 천지 사이의 한 죄인일 따름입니다. ...

더구나 이 서얼을 폐고하는 법은 천하 만고에 없던 바인데, 낡은 인습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허다한 인재들로 하여금 죄수처럼 머리도 빗지 않고 문 옆의 작은 출입구나 사립문 안에서 늙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혹 생전에 그 심정을 다 아뢰지 못한다면,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것이 어찌 다만 필부필부가 원통함을 품는 데 그치겠습니까. ... "라 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마자 상소를 올려 자신들의 억울한 처지를 아뢰었던 서얼들, 그 중 어유호가 있었다. 그 순서가 앞에서 네번째였으니 서얼들 중에서도 명망이 상당히 높았던 모양이다. 이때 영조는 서얼들의 요청에 근거가 있으나, 신중히 처리하겠다고 비답한다.

그 뒤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서얼된 한을 품고 살았을 어유호, 그는 청나라에서 들어온 《문선》을 읽으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서자에 대한 차별이 없다는 중국을 꿈꾸었을까, 책 속의 옛 사람과 벗하며 오늘의 현실을 잠깐이나마 잊었을까. 사람은 가고 책만 남았다.

*** 이상은 국립중앙박물관 강민경 선생 글이다.

 

내[台植]가 붙인다. 

 

서얼 차별이 사회문제라는 건 조선시대 지식인도 어느 정도는 실감했다. 더는 못 참겠다 해서 서얼들이 들고 일어난 시점이 영조 즉위 직후라는 점이 허심히 볼 수는 없다.  이는 자칫 역린을 건드릴 수 있는 문제였으니, 다름 아니라 영조가 서얼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 조선 역대 왕 중에 서얼은 아마 영조가 최초가 아닌가 한다.  선조가 특이 케이스이긴 하나, 아마 서얼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서얼 출신 영조는 우리 맘을 알아주리라 했으리라.  그건 그거고, 이 판본 개떡같기 그지 없어, 야메로 찍어낸 것이 분명하다.  저걸로 공부를 했다니 내 맘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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