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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단지점협丹脂點頰 전화장액栴花粧額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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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담은 화장

1.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한다(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던가. 얼굴에 무언가를 바르거나 문질러 꾸미는 화장은 단지 아름다워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뜻을 내보이는 매개이자 무기였다. 오죽하면 의거義擧에 비유되었을까. 그렇기에 옛부터 화장은 중요하게 여겨졌고 사람들의 큰 관심사였다. 지금껏 전해지는 숱한 고古 화장용구(유병, 분합, 거울 등등)를 보면 평상시와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아가고 다른 이들을 만나보려 한 옛날 사람들(여성만이 아니라)의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2. 하지만 현대 이전의 것으로 화장 자체를 다룬 예술작품은 그닥 흔치 않다. 특히나 붓글씨로 화장 이야기를 적은 것은 과연 몇 점이나 될까도 의문스럽다. '분칠'을 소재로 무슨 글씨냐는 인식이었을지? 그래서 이 작품이 퍽 흥미를 끈다. 글쓴이가 누구냐를 떠나서, 그 소재가 화장이기 때문이다.



우선 뜻부터 살펴보면...

붉은 연지로 뺨에 점을 찍고
전단 꽃으로 이마를 꾸민다


말 그대로 꽃단장이다. 이런 내용을 일부러 썼다면 그 이유가 있을 터, 작은 글자로 적은 낙관에 그 답이 담겨 있다.

書賀
蛾眉誌齡百號
栞布紀念


'아미'라면 요즘은 방탄소년단 팬클럽 ARMY를 떠올리겠지만, 여기서는 여인의 고운 눈썹을 가리키는 단어 '아미'일 게다. 수주 변영로의 <논개>에 나오는 "아리땁던 그 아미"말이다. 그런 단어를 제목으로 쓴 걸 보면 여성을 독자로 하는 잡지였음이 분명해보인다. 화장품 회사 사보였을까, 아니면 여고 학생회보나 문학동아리 동인지였을지? 그런데 그 잡지가 100호를 냈다니 꽤 성공적이었는가 보다. 다달이 냈다고 해도 8년 넘는 시간 동안 낸 셈이니 말이다. 이에 그 기념으로 글씨를 한 폭 받자고 내부에서 의견이 나왔겠지.

3. 이 글씨를 쓰신 이는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 이다. 이 분은 안동김씨 명문의 후예로 고려대학교 교수, 창문여고 교장과 재단이사장을 역임한 교육자이면서 글씨에도 능했다. 그 둘째 형이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아우가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이니 알 만하지 않은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그의 글씨도 두 대가大家 못지 않았다. 자, 그럼 이 작품은 어떠한가?

우선 첫인상은 '단정'하다. 세세하게는 적당히 흐트러진 부분이 없지 않지만, 전체를 보면 글자획들의 균형이 잡혀있다. 장중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격이 있다. 글자 크기를 조금씩 다르게 하여 리듬감이 느껴지게 한 것도 돋보인다.

그렇지만 글 내용을 생각하면 좀 더 아리땁게, 아니면 '단아'하게 쓰셨어도 좋지 않았을까. 물론 예쁜 글씨가 좋은 글씨는 아니지만, 요청하는 쪽의 상황에 맞추어주었다면 또 어땠을지 모를 일이다.

4. 아마 받아온 잡지사 벽에 걸려 있었을 이 글씨가 최근 어떤 온라인 경매에 나왔다. 시작가가 그리 높은 액수도 아니었는데, 아무도 입찰을 하지 않다가 막판에 누군가가 한 번 손을 들어 데려갔다. 한 시절 큰 이름을 얻었던 이의 흔적이 이렇듯 덧없이 흩어지고야 만다. 아니, 인연이 다했음을 깨닫고 물건이 제 스스로 자기의 새 주인을 고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 이상 강민경 선생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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