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1777년, 정조 임금이 청나라로 가는 사신에게 특별히 부탁을 한다.
"거 요즘 청에서 <사고전서>라는 책을 만든다지? 가서 한 질 얻어오너라."
왕의 부탁(이라고 쓰고 명령이라고 읽는)을 가슴에 품고 베이징에 간 사신들이지만, 막상 도착하니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 <사고전서>는 다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고민고민하다가 이분들, 꿩 대신 닭이라고 강희ㅡ옹정 연간에 만들어진 백과사전(이라고는 해도 오늘날의 백과사전과는 좀 의미가 다르지만) <고금도서집성> 초인본初印本 한 질을 은자 2천하고도 150냥에 구해온다.
은 한 냥은 상평통보로 네 냥, 대략 20만원 남짓이라니 그 값이 참...어마어마하다. 근데 사오면서도 청나라 관원에게 한 소리를 듣는다.
"조선은 글을 좋아한다면서 이제야 이걸 사갑니까? 일본에선 몇십 년 전에 벌써 세 질이나 들여갔소이다그려."
어쨌건 그 책들이 조선에 오자 정조는 기뻐하면서 장정을 다시 꾸미고 40권이나 되는 목록과 색인집도 새로 만든다. 그것이 지금도 규장각에 남아 전해져온다.
책을 사오고 십여 년 뒤, 수원 화성을 쌓을 때 정조가 정약용에게 이 책 속 <기기도설>을 빌려주면서 "자네, 이거 보고 뭔가 괜찮은 거 하나 만들어보게나." 하여 나온 게 그 유명한 거중기라던가.
시대는 흘러흘러 19세기 말, 중국 상하이에서 근대 출판의 힘을 빌려 <고금도서집성>이 두 차례 인출된다. 황족이나 고관만 보던 책을 민간에서도 값만 치른다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질이나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흘러흘러 조선에 들어온다.
그 거대한 책을 구입한 것은 바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경술국치 이후 조선 양반들을 무마시키면서 부려먹기 위한 ’협의기구’였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사실상 실권은 하나도 없었다. ’참의’라는 감투 하나 씌워주고 조선의 고문헌이나 역사자료를 정리하는 일 정도를 맡길 뿐이었다.
뭐, 여기서 펴낸 자료들이 후대의 역사 연구에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점도 없잖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고금도서집성>을 샀다.
찍힌 도장을 보니 구입해 들인 날짜는 1936년 3월 19일. 조선의 풍속과 역사를 연구하는데 참고문헌으로 삼으려 한건지 아니면 때마침 도서구입예산이 남아서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꽤나 열심히 읽었는지 묶은 끈이 다 떨어졌다.
9년 뒤, 해방이 되고, 중추원도 조선총독부도 사라진다. 그러고서 이 오천 권이 넘는 책은 누구의 수중에 들어갔을까.
장서인도 무엇도 남지 않아 알 길이 없다.
이렇게 두 권이라도 같이 있는 것이 다행이라 할는지.
***
이상은 강민경 선생 2015년 11월 18일 글이다.
이에 대해선 내가 2013년 초한 글이 있으니 아울러 참고 바란다.
일본은 벌써 사 갔는데 왜 너흰 지금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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