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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송은의 뮤지엄톡톡

오래된 할아버지 수첩 속 이야기-천수원명금고

by 여송은 2019.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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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송은 온양민속박물관 연구원 

 

우와~~ 할아버지 여기가 어디에요? 나무도 정말 많고, 연못도 있고! 저 사람같이 생긴 돌들은 뭐에요? 얼굴모양이 다 달라요~!

 
허허. 좋으냐. 여기는 온양민속박물관 이라는 곳이란다. 이 할아버지가 아주 오래전에 일한 곳이기도 하지.

 
와! 할아버지 여기서 일하셨었어요? 정말? 몇살 때요? 무슨 일 하셨어? 궁금해요!

앗! 할아버지! 저기가 전시실인가봐요! 빨리가요~~!

 
허허 이 녀석아 넘어져요~~ 천천히, 뛰지말고 가야지~!

 
벌써 40년 세월이 훌쩍 넘었는데도 야속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청년은 백발 노인이 되어 돌아왔는데 말이죠.

굽이쳐 올라가는 언덕길도 그대로이고, 언덕길 옆으로 보이는 아기자기 이름모를 풀들.

한걸음 한걸음 언덕길을 오를 때마다 보일 듯 말 듯한 마른 적색빛 벽돌 박물관.

모두 그대로입니다.

아, 변한 게 있다면 당시 내 허리춤 만했던 나무들이 어느새 부쩍 자라 박물관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자라느라 고생했다!
 
박물관 유물 하나하나 제 손을 거쳐가지 않은 것이 없었지요.

그때는 뭐가 그리 좋아 호미 한 자루 보겠다고 섬으로 육지로 돌아다녔을까요.

사실 좋고 나쁘고도 몰랐을 겁니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저 유물에 얽힌 이야기 하나 하나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요.

 

 

 

우와 신기한거 정말 많아요!!
아아!! 할아버지~~~! 저게 뭐에요? 징 같이 생겼어요!

 
아~ 징 같이 생겼지? 잘 보았네. 징은 아니고 저건  '금고'라고 하는 거란다.

 
금고? 돈 넣는 금고??

 
허허허. 돈 넣는 금고라고하기에는 너무 부실하지 않을까?
한자로 되어 있어 어렵지? 쇠 금 '金'자에 북 고 '鼓'자를 써서 쇠로 만든 북이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절에서 불교 의식을 치를 때, 종루나 당 처마에 걸어두고 쳐 소리를 낼 때 사용하던 거지.

 
아~~~! 왜 헷갈리게 금고라고 한데요! 쇠북이라고 하지!
할아버지! 여기 금고에 꽃이랑 덩쿨무늬 같은 게 있어요! 쇠에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새길 수 있었을까요?!
언제 만든 거에요? 정말 신기해요.

 
고려시대 만들었다고 하면 우리 강아지가 알까..
네 눈에도 신기하게 보이는구나. 허허. 나도 처음봤을 정말 두근거리고 신기했었지.    
 

 

천수원명금고薦壽院銘金鼓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6호, 금고金鼓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7호

1162년 제작, 한필석 기증,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신수리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유물. 

 
1976년 여름.
 
거 계슈? 물건 하나, 아니 두개 가져왔는디 아무도 안계슈?
 
아 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개울 건너 사는 한필석이라는 사람이오.
집을 질려고 땅을 파는데, 이런 둥글넙적한 게 두 개가 나왔소.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예사 물건이 아닌 것 같아 집으로 가져갔는데,
아! 마누라가 오래된 물건 집안으로 들이면 동티난나고 하며 한사코 밖에다가 갖다 버리라고 하질 않소.
그래서 내 그대로 그걸 개울에 던져 버렸지.
그 뒤로 태풍이 와 빗물에 쓸려갔겠거니 하고 일주일 뒤 개울가에 나가봤는데, 아니 이게 그대로 있질 않소.
그래서 엿장수한테나 팔아먹어야겠다 싶어 갖다주니, 뭐 흙 잔뜩 들은 쇠붙이 사려 들겠소. 퇴짜 맞고 군청으로 가져 갔지.
낑낑거리며 군청 가져갔더니, 요 밑에 박물관 짓는다고 하니 여기 갖다주라고 하질 않소.  
한 번 봐주쇼. 이거 박물관에 쓸만한 건지.  
 

저는 금고 두 점을 보자마자 가슴이 벌렁벌렁 거렸습니다.

앞면에 새긴 문양하며 또 다른 한 점에는 옆 면에 명문이 새겨 있었지요.
 

천수원명금고 옆면
옆면에는 1단 음각선으로 ‘正豊七年 壬午十一月 日 牙州地 薦壽院金口一座 重拾三斤捌兩造 納棟梁道人 練如謹記
정풍칠년 임오십일월일 아주지 천수원금구일좌 중십삼근팔량조 납동양도인 연여근기’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금고의 제작연도가 고려 의종 27년(1162년)임을 알 수 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설립자분께 전화 보고를 드리니, 설립자 분도 예사 물건이 아님을 직감하신 것 같았지요.

저에게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일러주시곤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그 당시 제 월급이 48,500원일 때입니다.

100원자리 지폐를 두둑하게 봉투에 넣어 준비하고,

금고를 가져오신 분을 모시고 박물관 앞 주막집으로 가 막걸리를 시켰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이제 자리를 뜨시려 하자 봉투를 쥐어드렸습니다.

그 분께서 봉투를 슥 보시더니 비누 한 장 값도 안 나오겠다며 그냥 두고 가셨습니다.
 
그렇게 이 금고 두 점이 박물관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금고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어 그분 집을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그 분은 뵙지를 못하고, 시골 부인들이 그렇듯 무서우셔서 그런지 문도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가끔 집 안에서 30대 중후반? 되어 보이는 부인이 "남편 없으니 돌아가세요" 라는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찾아갔지만, 문은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막걸리집에서가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작년인가 박물관 40주년이라 해서 다시 찾아 갔습니다.

이젠 저도 머리가 훵훵하니 희었고, 그 분도 이제 백발 노인이 다 되었겠지요.

문을 두드리니 역시 문은 열어주지 않고, 안에서 다 나이든 할머니가
"우리 영감 죽었으니 만나고 싶으면 하늘나라로 가서 만나!" 라고 하셨습니다.

허허 이제는 이 세상 분이 아니신가 봅니다.

감사의 인사를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그때 왜 봉투 받지 않고 그냥 가셨는지 묻고 싶기도 했는데 말이지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오래된 물건 집안에 들이면 동티난다고 내다 버리라고 말했던 그 부인의 얼굴은 볼 수 없었고,

문 건너로 또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내다 버리라고 한 그 부인 덕에 이 두 점 금고가 박물관에 올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금고가 박물관에 올 수 있게 도와 준 것이 아닐까요.

얼굴을 끝내 볼 수 없던 그 부인은 혹 금고를 지키는 보살이 아니었을까요.
 
지금 제 눈 앞에 있는 금고를 보니 그 때 생각에 다시 마음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저릿해옵니다.
 
 
할아버지~~~ 뭐해요? 우리 이제 가요~~!
 
오냐 오냐 그래그래. 어여 가자꾸나.

 



또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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