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현거사玄玄居士께서 컨디션 만땅이셨나>
철종 임금의 사위이자, 태극기를 만들고, 갑신정변의 주역이었으며, 망명과 유배를 밥먹듯 다닌 정객에, 일본의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요,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 - 현현거사 박영효(朴泳孝, 1861-1939)를 이야기하려면 이 정도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근대의 그 누가 복합적 인간이 아니었으랴만, 박영효만큼이나 묘한 궤적을 보인 이도 흔치는 않다. 그리고 그는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1인자가 못 된 인물이기도 하다.
갑신정변에 관해서는 누구든 김옥균을 먼저 들먹이지 않던가? 그래서인지 그는 훗날 갑신정변을 회고할 때마다 "혁명을 김옥균이만 했던가? 준비는 나와 홍영식이 다했지" 같은 식으로 김옥균을 한껏 깎아내렸다.
친일 행적이라면 이완용에 밀린다. 박영효는 작위가 이완용보다 더 높았음에도 그가 죽고서야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자리를 물려받는다.
하여간 그는 천수를 누렸고 살아생전 누릴 영화도 거진 다 누렸다. 그래서인지 그가 쓴 글씨는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박영효만이 아니라 이 시기 내로라하는 이들의 서화는 (솜씨가 어떤지는 둘째치고) 적지 않다. 글씨를 쓰고 난초를 친다는 것, 그건 자오自娛의 소일거리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훌륭한 교우의 수단이자 과시의 한 상징이었다.
망명객들은 글 좀 아는 일본인들에게 서화를 팔아 생계를 꾸렸다. 충분한 수요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달라져 귀국 후 승승장구한다 하면 귀인貴人의 솜씨를 얻어 기념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이 글씨도 예외는 아니다. 소장자의 말에 따르면 이 글씨는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 왔던 고바타小畑라는 이가 당시 궁내부대신이던 박영효에게 직접 받은 것이다. 아마 전부터 인연이 있었던지 며칠 묵고 돌아가는 날 아침에 써준 것이라는 내용이 보관상자 뚜껑에 적혀있다 한다.
처음 이걸 보고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썼나 싶었는데, 아침나절 썼다면 둘 중 하나겠다. 박선생이 낮술을 하는 타입이었거나, 이날따라 몸이 가뿐했던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글씨가 호쾌하기 그지없다.
박영효의 다른 글씨들은 작대기를 얽어놓은 것처럼 뻣뻣하거나, 선이 무너져있다는 평을 받을만큼 흐트러진 경우가 많다. 그런데 유달리 이 작품은 흥에 겨우면서도 아직 나름대로의 격을 잃지 않아 보인다.
마흔 조금 넘은, 아직 한창 나이일 때 글씨라 그런 것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내용은 불가佛家의 격언 일부를 편집한 것인데, 무슨 뜻인지 한번 파악해보시기를.
百年三萬六千日 백년은 삼만하고도 육천 날이러니
得忻忻處松千尺 소나무 천 척임을 깨달은 게 기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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