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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홍낭시다, 한국이 처음으로 판 해외 힌두사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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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cultural heritage investigation team discovers 317 relics in Laos Temple
연합뉴스 / 2022-06-30 14:24:22

Korean cultural heritage investigation team discovers 317 relics in Laos Temple

SEOUL, June 30 (Yonhap) -- A Korean cultural heritage investigation team discovered 237 gold relics and 317 relics, including crystals of various colors, at the Hong Nang Sida Temple in Laos.It is ev ...

k-odyssey.com


라오스 홍낭시다는 한국문화재사 혹은 ODA 역사에서는 독특한 위상을 지닌 곳이라, KOICA가 주도하는 ODA 사업이 문화재로 영역을 확장한 그 출발선을 알린 데가 홍낭시다요

한국문화재가 해외 고건축물 복원에 나서 그것을 시험하는 총성을 울린 곳이다.

이 홍낭시다는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이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라 일컫던 시절, 그 사업자로 지정되어 작업에 돌입했으니, 그 시작과 착수 모두에 내가 직간접으로 간여한 인연도 있어 나로서는 더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우선 그것이 자리하는 곳을 본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북남 방향으로 관통하는 그 거대한 메콩강이 지나는 중앙지점이라, 그 강변에 자리한다. 그렇다 해서 바로 강변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강에서 좀 많이 떨어진 지점이다.

저런 강변이라는 지정학적 특징은 우리로 견주면 여주 신륵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신륵사 역시 한강 중앙지점을 관통하는 강변이라, 첫째 강을 이용한 수로 안전을 기원하고 둘째 그 휴게소 역할을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듯이 저 홍낭시다를 일부로 포함하는 더 거대한 왓푸 참파삭 문화경관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곳은 크메르제국시대 그 영역에 속한 이곳은 힌두사원이 들어섰다. 같은 인도 문화권을 기반으로 삼는 불교가 힌두교를 비판하며 독립했지만, 그 축적한 문화기반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그렇듯이 많은 부문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 복원 작업이 시작되기 전 홍낭시다 모습은 이랬다. 기억이 아리까리해서 자신은 없지만, 방향성을 보면 우리한테 익숙한 그 동서남북 방향일 것이다. 곧 바라보는 이 기준으로 오른쪽이 동쪽, 반대편이 서쪽, 아래쪽이 남쪽, 위쪽이 북쪽일 것이다.

오른쪽 길쭉이 튀어나온 부분이 본전으로 통하는 통로이며 왼편 불뚝이 오동통이 신전 주축일 것이다.

이걸 보면 중심구역을 서측 전실 동측 전실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내 예상은 맞다. 오른쪽이 동쪽이다.


인도 혹은 동남아 신전건축은 이런 식으로 구성되는데, 신전으로 통하는 동쪽 통로 부분을 흔히 세분해서 플랫폼과 만다파라 하느니, 플랫폼은 결국 마당인 셈이요, 만다파는 남대문 지나 안채로 지나는 길목이다. 주변으로는 바라이라 부르는 거대한 연못이 있으니 홍낭시다 역시 당시 것인지 자신은 없으나 동쪽 전면에 바라이가 있음을 내가 현장서 확인했다.

신전 주축이 위치하는 지점을 셀라라 요즘 부르는데 cellar 그거라 이것이 본래 인도 혹은 동남아문화권 본래 명칭이 아님은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건축물이 남북 중심축을 이루며 남쪽에 남대문을 두고 가장 중요한 주축 건물을 북쪽 중앙지점에 두니, 이는 천문을 본뜻 것이라 북극성을 염두에 둔 발상이라

서남아 그리고 동남아 건축이 동아시아 그것과 갈라지는 그랜드디자인이 바로 이 대목이라, 후자가 남북 장축에다 가장 중대한 건물을 북극성 자리를 본뜬 남면南面 자오선 지향인데 견주어 전자는 동서 장축에 대문은 동쪽에 마련하고 주축 건물은 서쪽 끄터머리에 두는 동면東面 지향이라는 데서 결정적으로 갈 길을 달리한다.

왕자 자리를 박차고 6년간의 각종 고행을 거쳐 보리수 나무 아래서 고마타가 마침내 인류 정신혁명사에 혁명을 불러올 그때 새벽 여명이 동쪽에서 일어 정확히 고마타 정수리로 빛이 들었으니 고마타는 서쪽 끝단에 가부좌를 한 채 동쪽을 향해 앉아있었으니 바로 이것이 동서장축 동면하는 인도문화권 건축디자인의 상징이다.

아울러 왜 유독 석굴암만 동서장축이며 그 부처가 동해 바다를 바라보는지를 이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해명한다. 이 부처는 볼짝없이 석가모니불이며 그 건축가는 볼짝없이 인도 혹은 동남아 출신이다.

그 건축가 그룹 대장을 삼국유사에선 항마抗魔라 했으니 그는 신라 승려도 중국승려도 일본승려도 아닌 인도 혹은 동남아 출신이었다. 동아시아 건축가는 도저히 발상할 수 없는 구조가 석굴암이다.


이 사업 목적은 발굴이 아니라 신전복원이다. 하지만 복원에 앞서 그 구조를 파악해야 했기에 일정 부분 발굴조사를 병행할 수밖에 없었으니, 애초 이 사업을 시작할 적에 발굴을 할 것인가 아니면 최소한의 복원만 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나야 어차피 발굴로 갈 줄 알았다. 왜?

한국고건축은 발굴에 대한 욕망을 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깐.

결국은 파리라고 봤고 실제로 그리됐다. 바로 앞 사진이 붕괴한 석조부재들을 대략 걷어내고는 중심부를 파제낀 모습이다.

이 작업 이전 모습과 비교하면 천양지차가 난다. 건축부재들을 걷어내고 밑둥을 파기 시작하니 중심부가 완연히 드러났다. 우리네 무덤 발굴로 치환하면 이른바 매장주체부에 해당하는 부분이 속살을 드러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하기는 했지만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므로 아래에다가 다시 제시한다.


하나의 건축물을 두 개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라 위쪽에 공중에서 내려다본 평면도이며, 아래쪽이 측면 입면도다. 아래 그림은 조금 묘해서 짬뽕인데 단면도를 겸했다. 그러니깐 절반을 짤라본 모습도 섞였다.

이에서 주시할 대목이 중심건축물, 그러니깐 셀라라고 표현한 그것 중에서도 중앙홀이라 표현한 지점이다. 회색으로 칠한 부문이 이른바 생토층이다.

이 측단면도를 보면 중앙홀 아래로 깊이 쳐박힌 구멍이 난 것을 본다. 이 구멍 깊이가 대략 4미터라 하는데, 상당한 깊이다.

대략 2미터는 생토층 위에, 다시 2미터는 그 아래로 파고 들어갔다. 저러면 물이 날 것 같은데 어떤지 모르겠다.


암튼 저와 같은 발굴조사를 병행한 결과 수습한 유물들이 이렇댄다. 이른바 귀금속류에 해당하는데 금제품을 필두로 수정 마노 같은 것으로 갈아만든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도대체 이것들이 뭘까? 고고학 고건축학이야 매양 성분분석해서 수입산이네 아니네 따지고 수입산이라면 어디에서 들여온 것일까? 하고는 전가의 보물 국제교류 양상이 어떠네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고고학 한국미술사 한국건축학이 살아남았다. 그건 학문이 하는 일이 아니라 성분분석기가 하는 일이다. 기계가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저런 배포 사진을 보고는 저런 유물들은 볼짝없이 공양품이라 생각했다. 무엇을 위한 공양품인가? 이 힌두사원 낙성에 즈음해 참석자 혹은 참배객들이 던진 공양품이라 생각했다. 그러려면 저들 유물은 저 중앙홀 아래 토층에서 발굴되어야만 했다.

현장 조사책임자 그 멀대 백경환이 마침 입국한 상태라 전화로 연결해 물었더니 내 예상은 틀림이 없었다. 저 중앙홀 구녕에서 집중 출토했단다.

그 말을 듣고선 내가 부탁도 했다. "제발 지진구니 진단구니 하는 말  더는 나오지 않으면 좋겠다."

한국에서는 고고학 미술사 건축학 하는 사람들이 저런 유물들만 나왔다 하면 하도 지진구니 진단구니 하니 하는 말이다.

저 유물 몇 개를 세부로 본다.


볼짝없다 공양품이다. 낙성 등에 즈음해 참배객들이 낸 공양품이다. 참배객은 주종이 여성이며, 이들은 권력자 집안 사람들이다. 그네들이 힌두 신께 바친 공양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가 사는 힘은 권력자의 부인들이다. 그것을 홍낭시다에서 우리는 다시금 실감한다.

치맛바람은 종교가 살아가는 힘 그 자체다.


은제 불상도 나왔다는데 크메르시대 힌두사원에서 이런 불상은 훨씬 후대 것이라 하니 훗날 누군가가 봉안한 듯하다.

뭐 힘에 따라 힌두사원이 불교사원이 되기도 하고, 반대가 되는 일은 다반사니깐 말이다.


이런 사진들도 잔뜩 첨부했는데, 이건 뭐 딴 의도 아니다. 우리 이만큼 열심히 일했다 사업비 깎지마라 우리 이렇게 열라리 라오스 가서 국위선양한다 이런 과시에 다름 아니다.

아래는 문화재재단이 배포한 보도자료 전문이다. 이는 도하 국내 언론을 통해 보도됐으며, 우리는 그것을 영문으로 제작해 배포했다. 맨 앞 첨부한 기사가 그것이다.

천 년 만에 다시 반짝이는 고대 크메르 왕조의 금제 유물
라오스 홍낭시다 사원에서 다량의 금(金)제 유물 출토
라오스 최초 중앙갱 형태의 주신전 확인, 금제 유물 237점 등 유물 무더기로 출토

“천 년 동안 라오스 남쪽에서 우리를 기다린 고대 크메르의 보석들이 다시 빛을 받고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빛나는 이 유물들은 고대 라오스의 금속세공 기술과 무역의 실마리 조각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어요.”
- 수안사반 빅나켓(Suanesavanh VIGNAKET) 라오스 정보문화관광부 장관

문화재청(청장 최응천)과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은 문화유산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이하 “문화유산ODA”)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라오스 홍낭시다 보존복원 사업’에서 라오스 최초로 중앙갱 형태의 주신전을 확인하고, 금제 유물 237점을 포함해 총 317점의 유물을 수습했다고 밝혔다. 홍낭시다 사원*과 같이 라오스에서 이처럼 많은 수의 금제 유물이 출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캄보디아, 베트남 등을 포함한 고대 크메르 왕조**의 영역에서도 이번처럼 많은 수의 금제 유물과 장신구류 유물이 출토한 것은 매우 드문 경우다. 이는 2019년 라오스에서 최초로 발견된 금동요니***와 더불어 해외 문화유산 복원 사업에서 성취한 매우 주목할 만한 성과이다.

*홍낭시다 사원: 시다 공주(낭시다 Nang Sida)의 큰 건물(홍 Hong)이란 뜻이며, 위기에 빠진 왕국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괴물에게 제물로 바친 시다 공주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라는 구전 설화가 있다.
**크메르 왕조: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동남아시아에 존속한 크메르 제국을 이끈 왕조. 전성기 기준 오늘날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 등에 해당하는 거대한 지역을 지배했다고 알려졌으며 앙코르 와트, 바욘 사원 등 세계적인 유적들을 남겼다. 홍낭시다가 속한 왓푸-첨파삭 지역은 크메르 제국 왕들의 후원이 있었으며, 성산을 보기 위해 순례를 떠나는 성지였다.
***금동 요니: 요니는 고대 크메르 시대의 유물로, 여성의 생식기상(像)이다. 한국문화재재단 국제협력단은 2019년 홍낭시다 사원 플랫폼 하부에서 금동 요니를 발굴했다. 이는 금동으로 만들어진 요니를 라오스에서 발견한 최초의 사례이며, 고대 크메르 교류사 연구의 핵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해외 문화유산 첫 복원 사례인 라오스 홍낭시다 사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 사원은 비문에 등장하는 링가푸라 고대도시의 주신전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첨탑(Sikhara) 등이 모두 붕괴되어 돌무더기가 된 채로 오랜 세월 폐허로 남겨져 있었다. 한국문화재재단은 2013년부터 홍낭시다를 복원하기 위해 다양한 학술적인 조사와 함께 복원을 추진하여 2020년에 사원의 만다파*와 플랫폼을 복원하였다. 이후 2021년부터 2022년 5월까지 진행한 사원의 성소(聖所)인 셀라(Cella, 이하 ‘셀라’) 붕괴 부재 해체 조사에서 드디어 많은 수의 유물과 함께 내부구조가 명확하게 확인된 것이다.

*만다파(mandapa): 예배나 의식을 준비하는 장방형의 공간

홍낭시다 셀라 붕괴부재의 해체 과정에서 출토된 금제 유물은 총 237점으로 유물별 출토 수량은 금반지 5점, 금박판 217점, 금장식류 15점이다. 출토된 금반지의 둘레는 약 2.5㎝이며 장식부분에는 약 0.2mm의 두께로 세공된 부분도 확인되고 있다. 금박판은 0.2~0.3mm의 두께로 얇게 제작되었으나 일정한 경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꽃무늬의 금박판 유물도 함께 출토되었다. 현장에서 휴대용 형광 엑스선 분석기(P-XRF)로 성분을 분석한 결과, 금반지는 금 70~80%, 은 15~25%, 구리 3~7%의 비율로 제작되었으며, 금박판은 금의 함량이 70~85%인 것과 50~60% 정도인 유물로 구분된다. 이처럼 홍낭시다 셀라에서 출토된 금제 유물은 섬세한 금속 세공을 통해 유물에 따라 합금 비율을 달리하여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보석류 및 석가공류는 총 80점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크리스탈로 분류되며 색상에 따라 백수정, 녹수정, 적수정, 황수정 등으로 구분된다. 한국문화재재단 전유근 박사는 “홍낭시다가 위치하고 있는 참파삭 일대는 지질학적 특성상 금과 크리스탈이 산출되지 않는 곳이다. 따라서 이번에 출토된 금과 크리스탈은 다른 지역에서 제작되어 홍낭시다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밝혔다.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ODA팀은 출토된 유물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당시의 금세공 기술, 국가 간 교역 루트 등을 연구할 예정이다.

유물 중 가장 특이한 것은 힌두교 사원으로 축조된 홍낭시다 사원에서 힌두교의 상징 유물인 석조 요니와 함께 은제 불상이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불상은 수많은 붕괴 부재로 덮여 있어 인위적으로 사람이 가져다 놓을 수 없는 곳에서 출토되어, 이를 근거로 홍낭시다 사원의 붕괴 시기를 추측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라오스에 불교가 국교로 받아들여진 시기는 14세기이며, 프랑스 극동연구원(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EFEO) 고고학자 크리스틴 하위스록(Christine Hawixbrock) 등 현지 전문가들은 은제 불상을 17세기 양식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홍낭시다 사원은 은제 불상이 제작된 시기까지 붕괴되지 않았을 것으로 전제한다면 건립 후 최소 500년 동안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향후 홍낭시다 사원의 붕괴 시기를 조금 더 명확하게 밝혀내기 위해 은제 불상에 대한 미술사적 조사와 셀라에서 출토된 목탄의 탄소연대분석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홍낭시다 사원 셀라의 내부에서 수많은 크메르 유적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례적인 중앙갱(中央坑, Central Shaft)* 구조가 확인된 것이다. 홍낭시다 사원은 중앙홀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4개의 전실(前室, Antechamber)이 있으며, 셀라 중심의 바닥면에서 최소 4.5m 깊이의 중앙갱이 발견되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바이욘 사원에서 유사한 형태의 중앙갱이 확인되며, 라오스에서는 한국 팀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다. 이는 학자들마다 견해를 달리하는 축조시기를 명확하게 해주는 중요한 증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크메르 제국 대표 사원과의 구조적 유사성, 과거 확인된 비문의 내용과 탄소 연대측정 결과 등을 종합해 볼 때 홍낭시다 사원은 12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갱: 4개의 전실 사이 한가운데 땅속을 파 들어간 지하 구조물로서, 세상의 중심에 솟아있는 성스러운 산(첨탑)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지하에 조성하며, 중요한 신상을 안치하기도 한다.

라오스 홍낭시다 유적에는 한국문화재재단의 연구원들 이외에 라오스 현지 주민들도 복원에 참여하고 있다. 라오스 현지인들의 역량 강화 사업을 함께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오스 왓푸세계유산사무소 암폴 셍파찬(Amphol SENGPHACHANH) 소장은 “라오스에 문화유산ODA사업을 3개국이 하고 있지만 붕괴된 사원의 조사부터 복원까지 전 과정을 외국팀과 협력해서 수행한 것은 한국과의 홍낭시다 보존복원 사업이 처음이다. 왓푸세계유산사무소 직원들도 복원 과정에 참여하여 매우 의의가 깊다.”라고 전했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이번 발굴 조사에 대한 심도 있는 복원과 연구는 물론, 향후 관광자원화를 통한 수원국의 자립기반 조성을 계획 중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더 많은 사람들이 세계유산 홍낭시다 사원을 향유할 수 있도록 라오스 직원 교육과 관람로, 전시관 개선 등 종합 정비를 진행할 예정이다.
2013년부터 홍낭시다를 연구한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ODA팀 백경환 팀장은 “이번 발견으로 홍낭시다 사원의 축조 및 붕괴 시기, 크메르인의 금속 제작 기술 및 대외교역 등과 같은 생활상까지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증거를 확보하였다. 홍낭시다 사원은 수리야바르만 2세가 당대 최고의 건축가 디바카라판디타*를 파견해서 건립한 사원으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드디어 그 가치를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고대도시(쿠룩세트라, 링가푸라)**, 고대길(Ancient Road) 등과의 관련성이 규명된다면 크메르 건축의 역작으로 재조명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수리야바르만 2세와 디바카라판디타: 수리야바르만 2세는 캄보디아 앙코르의 왕(재위 1113~1150년경)으로, 앙코르 시대의 최성기를 누렸으며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디바카라판디타는 수리야바르만 2세의 정신적 스승이자, 당대 가장 뛰어난 건축 장인이었으며, 또 다른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캄포디아 프레아 비에하르 사원의 전체 공사를 맡기도 했다.
**쿠룩세트라, 링가푸라: 쿠룩세트라는 5~6세기 무렵 메콩(강)의 서쪽 강변에 고대 인도의 성도(聖都)를 재현하여 건립되었던 고대도시다. 푸카오(산)에 우뚝 솟은 돌기둥을 시바신이 링가의 모습으로 현현한 것으로 믿어 그 산을 ‘링가의 산, 링가파르바타’라고 불으며, 링가푸라는 성스러운 산 주변으로 형성된 고대도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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