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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郎. 藤島亥治郞. 등도해치랑)

by Herodopedia taeshik.kim 2018.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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ふじしま がいじろう. 1899. 5. 1~2002. 7. 15 


일본 건축사가. 1933년 이래 1945년까지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朝鮮宝物古跡名勝天然記念物保存会) 위원으로 일하면서 식민지 조선 고건축에 대한 조사 활동을 했다. 제국 일본이 패망해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平泉遺跡調査会를 조직하고 毛越寺와 中尊寺 整備, 中山道宿場 연구 등을 진행했다. 오사카(大阪) 시텐노지(四天王寺, 사천왕사) 가람 재건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3세기를 살며 103세로 장수했다. 


1899年, 岩手県 盛岡市 出生

1920年, 第六高等学校 卒業

1923年, 東京帝国大学 工学部 建築学科 卒業․ 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 경성공업학교京城工業学校 조교수助教授

1924年, 同校 教授․ 朝鮮総督府 技師兼任

1929年, 東京帝国大学 助教授

1933年, 工学博士, 東京帝国大学 教授(~1960)

1950年, 文部省 文化財審議会 専門委員(~1980)

1954年, 平泉遺跡調査会 代表

1960年, 東京大学 名誉教授

1965年, 四天王寺 伽藍 復元으로 BCS 建築賞

1968年, 日本芸術院恩賜賞


著書

「朝鮮建築史論」『建築雑誌』530-536掲載(1930)

『台湾の建築』(1948)

『日本の建築』(1958)

『平泉 : 毛越寺と観自在王院の研究』(1961)

『古寺再現』(1967)

『古社寺の旅』(1973)

『韓の建築文化』(1976)

『復興四天王寺』(1981)

『平泉建築文化研究』(1995) 


<일본 고건축학자 후지시마와 한국고건축>


(2002.08.12 11:18:05)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판단기준이 평가자에 따라 다르겠으나 신라사와 관련된 역사학이나 고건축 및 고고학계를 망라해 가장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을 들라면 아마도 그 영광의 월계관은 한국인이 아닌 일본학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1945년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를 통틀어 일본 최고의 고건축학자라는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그는 1930년 「조선건축사론」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했다.


여기에 실린 조선건축에 관한 여러 논문 중에서도 경주의 시가배치도를 나름의 토대로 상상해 복원한 '신라왕경복원도'는 7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가장 완벽한 신라 왕경지도로서 불후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의 왕경 추정도는 현재 경주 일대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각종 발굴의 성과가 그 정확성을 입증하고 있어 조사자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후지시마가 복원한 왕경지도는 일제시대 당시의 경주 지형도를 기초로 했다는 점이다.


이런 그가 지난달 15일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3세. 1899년 모리오카(盛岡)에서 태어나 2002년에 타계했으니 3세기에 걸친 삶을 산 셈이다.


일제 식민시대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여느 학문 분야를 막론하고 국내에서는 이 시기에 활약한 일본 연구자에 대한 인물연구가 무(無)에 가까운 실정인데, 후지시마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건축사를 논할 때 후지시마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인물이고, 실제 그의 각종 연구성과가 이곳저곳에서 무수히 인용되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인물연구를 국내에서는 단 한 편도 찾을 수 없다.


다른 학문이 그런 것처럼 그의 조선건축사 연구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배와 결코 동떨어질 수는 없을 터이므로 이에 대한 연구가 나와야 할 것이다.


신라왕경복원도와 함께 경주 황룡사 가람배치도에 관한 그의 또 다른 견해도 한국 학계에서는 후지시마라는 이름을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그는 황룡사가 탑 하나에 금당 하나를 남북 일렬로 배치한 이른바 1탑1금당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는데 1970-80년대 활발한 발굴조사로 1탑3금당식으로 밝혀지기 전까지 약 반세기 동안이나 이론을 용납하지 않는 통설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다.


후지시마와 조선을 연결한 고리는 도쿄(東京)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과 스승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였다. 세키노는 1902년 6월 27일 조선에 상륙, 전국을 일주하며 조선 고건축에 대한 일제조사를 벌였다.


세키노는 조선 강제병탐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1930년대까지 경주와 평양, 부여를 비롯한 조선 각지의 고적조사 및 발굴을 진두지휘한 거물이었다.


일본 고건축과 고미술 뿐만 아니라 조선 고건축 및 고미술사를 확립한 세키노의 제자인 후지시마는 1922년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 그 해에 경성(서울)의 고등공업학교 조교수로 부임했으며 이듬해 교수로 승진했다.


이때 그는 조선총독부 기사(技師. 일종의 건축사)를 겸했는데 세키노의 지도 아래 조선건축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러다가 1929년에는 모교인 도쿄제국대학 조교수에 임명돼 1960년 정년퇴임했다. 퇴임 뒤에는 시바우라(芝浦)공업대학 교수로 다시 10년을 더 일했다.


도쿄제국대학 교수 시절인 1936년부터 1980년까지 무려 44년 동안이나 한국의 문화재위원에 해당하는 문부성 국보보존회 위원을 지냈다.


후지시마는 오사카의 유서깊은 사찰 시텐노텐지(四天王寺) 오중탑(五重塔)을 중심으로 하는 건축을 나라(奈良)식으로 복원설계함으로써 1968년 일본예술원이 수여하는 은사상(恩賜賞)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일본건축학회 대상을 받기도 했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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