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무엇인가를 한꺼번에 한 장소에 매납한 곳을 교장(窖藏)이라 부르거니와, 청동기를 묻은 곳을 동기교장銅器窖藏이라 한다.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喀左縣 지역에서 出土한 靑銅器를 西周시대 初年에 그 封國 중 하나인 燕國에서 山川祭祀를 지낼 때 埋藏한 청동예기(青銅禮器)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유적은 遼寧省 喀左縣 西南쪽 대릉하(大淩河) 兩岸 구릉지대 정상에서 발견됐다. 1941년 이후 모두 6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출토한 銅器는 연대가 西周 초기, 혹은 商末~周初에 속한다고 추정한다.
1941年 고로구촌(咕嚕溝村)에서 출토한 周初 동정銅鼎 1점은 높이 50여㎝이며 重量은 70여 ㎏으로 銘文이 있다. 1955年, 마창구馬廠溝 출토 周初 銅器 16건 중에는 鼎․․․ 盂․․卣․壺․盤과 압형준(鴨形尊) 등이 있으며, 그 중 盂에는 “侯作盂”이라는 銘文이 있어 燕侯가 만든 盛食器임을 엿보인다고 중국 학계에서는 본다.
1973年, 북동촌北洞村에서 두 차례 걸쳐 商末~周初 시대에 해당하는 銅器를 발굴했다. 제1차 출토 5건은 모양이 같은 소구광견호(小口廣肩壺) 1件이며, 개중 1件에는 銘文 6字가 있다. 제2차 조사에서는 6件이 출토됐으니 종류로 보면 方鼎․ 圓鼎․ 壺 等이다. 개중 方鼎에는 銘文 24字가 있어 作器者와 그것을 상으로 받은 사람 이름이 있고, 그 底部에도 또한 “侯亞”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확인된다.
1974年, 산만자山灣子에서 周初시대에 해당하는 銅器 22件이 수습됐다. 종류로는 鼎․鬲․․․盂․尊․卣 等이 있으며, 개중 銘文이 있는 것은 도합 15件이니, 그중 伯矩를 위해 만든 것도 있다.
1979年, 소파태구小波汰溝에서도 소량의 商末~周初 銅器가 출토되니 그 중 1件의 作器者는 “圉”이니, 그는 일찍이 周王이 成周에서 舉行한 典禮에 참가한 적이 있어 이때 부상으로 받았다고 본다.
중국학계에서는 喀左 銅器窖藏 발견을 周初 燕國 역사 연구에 도움을 주며, 출토 銅器는 北京 유리하琉璃河 연국묘지(燕國墓地)와 관계가 밀접하다고 본다. 특히 두 지역 銅器 銘文에 보이는 “侯”는 字體가 완전히 일치하며, 더구나 “侯亞” 또한 北京 노구교蘆溝橋 출토품으로 전하는 ‘亞’와 계통을 같이하며, 伯矩가 만든 器 또한 일찍이 유리하琉璃河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나아가 琉璃河 253號墓에서 발견된 方鼎․․卣 등과 같은 器는 銘文 內容이 小波汰溝에서 출토된 圉과 같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周初 燕國이 세력을 미친 범위가 이미 遼西 지구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고 중국학계는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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