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츠카와 난학(藤塚と蘭學)」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 1879~1948)의 학문적 연원은 무엇인가? 여기에서는 선대의 난학(蘭學)을 이어 근대학문으로서의 동양학을 연구한 후지츠카 가문의 자료를 주로 살피고자 한다.
이번 특별전은 개관 10주년을 맞아 2023년 상반기 특별기획전으로 개최된다. 먼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후지츠카(藤塚) 가문의 가계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후지츠카(藤塚) 가문의 가계(家系)>
1代 備後掾 → 2代 對馬掾(?∼1720) → 3代 宮內(?∼1753) → 4代 知直(雅樂, 1715∼1778) → 5代 知明(式部, 1737∼1799) → 知機(夭折, 圖書, ?~1781) → 6代 知周(晋齋, 雅樂, 1766∼1802) → 8代 知雄(權之進) → 糧助 → 俁(前野良澤의 後嗣) → 信(東菴, 華山, 1803~1855) → 7代 知能(東卿, 源吉, ?~1824) → 9代 知正(勝見, 호 金華) 8代 知雄(權之進) ― 糧助(분가함) ― 우타(ウタ)+10代 守雄(知尙, 1787~1852) → 勝之助(요절함) → 11代 足橘(知敎, 22세 卒) → 마쓰(マス)+小川則要 → 사다(サダ) → 謙吉(요절함) → 12代 鄰(1879~1948)+사다(サダ) → 12代 鄰(1879~1948)+사다(サダ) → 藤塚明直(1912~2006, 기증자) → 藤塚知義(1916~1993) |
후지츠카 가문은 일본 동북 미야기현(宮城縣) 시오가마시(塩竈市)에 있는 시오가마신사(塩竈神社)의 신관(神官) 집안으로, 후지츠카 치카시에 이르러 12대째 계승되었다.
난학(蘭學)은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에 주로 네덜란드[和蘭]를 통해 전래된 서양의 의학과 과학 지식을 연구한 학문이다. 후지츠카 가문은 난학의 세례를 통하여 신학(神道學을 말함), 의학, 금석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전통사회에서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동아시아 삼국은 청나라의 고증학, 조선의 실학, 일본의 난학이 일어나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여갔다.
후지츠카 기증유물은 2006년 「추사글씨 귀향 전(展)」과 2008년 「후지츠카의 추사연구자료 전」을 통해 주로 추사 김정희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소개된 바 있다.
이에 올해는 추사박물관 개관 10주년을 맞아 후지츠카 가문자료를 중심으로 난학과 후지츠카 가문의 변화, 그리고 후지츠카 치카시의 교유와 생애, 그리고 그의 학문을 살피고자 한다.
제1부 난학(蘭學)의 풍경
일찍이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는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 고가 세이리(古賀精里, 1750~1817) 등이 초기 근대사상사를 이끌었다고 주목하였다. 근대로 가는 사상의 길이 열린 것이다.
‘춘연추안(春燕秋雁) 조래남북(徂徠南北)’, 이는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 1879~1948)와 후일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을 편찬한 모로하시 테츠지(諸橋轍次, 1883~1982)가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갈 때 상유우인(尙由迂人) 등이 「송영회시첩(送迎會詩帖)」에 쓴 문구이다.
일본에서 오규 소라이의 위상을 상징하는 문구로 보인다.
일본의 경우, 청나라의 고증학이나 조선의 실학에 비해 한문과 외국어의 자국어로의 번역 문제가 초기부터 매우 깊이있게 논의되었다.
『논어징집람』이나 『훈역시몽』은 그러한 논의의 가장 직접적인 성과물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오규 소라이의 문집, 고가 세이리(古賀精里의 대련, 네덜란드어사전인 『화란문전자류(和蘭文典字類)』, 지리적인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일본수토고』와 지도류, 의학필기, 금석학고증서인 『평비고증』에도 후기의 수필집, 오주명소도회는 근대로 가는 일본의 모색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19세기 후반 번교로서는 가장 큰 학교였던 홍도관(弘道館)의 기문은 가히 그 난학이 근대체제를 어떻게 만들어갔는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제2부 후지츠카 가문
후지츠카 가문은 일본 동북 미야기현(宮城縣) 시오가마시(塩竈市)에 있는 시오가마신사(塩竈神社)의 신관(神官) 집안이다. 후지츠카 기증유물 중 고서류와 고문서류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그 가운데 일부 자료를 선보인다.
후지츠카 가문은 대대로 시오가마신사(塩竈神社)의 사가(社家: 신관 직업을 세습하는 집안)였는데, 삼사겸대염시태부(三社兼帶塩蒔太夫)라고 칭했고, 지행고(知行高: 수확한 미곡의 수량) 720문(文)을 배령(拜領)하여 염산공역(塩散供役)을 지낸 집안이다.
염시태부(塩蒔太夫)란 제례의 행렬 앞에서 소금을 뿌리는 역(役)을 말한다.
후지츠카 씨는 수씨족리(守氏足利) 시기(17세기 이전)에는 모리우(森), 17세기 이후 에도(江戶) 초기에 후지츠카(藤塚)로 성을 바꾸었다.
에도시기에는 4대 토모나오(藤塚知直, 雅樂, 1715∼1778)가 가문을 일으켜 그의 아들인 5대 도모아키(藤塚知明, 式部, 1737~1799) 때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다.
따라서 후지츠카 가문의 인물 중 난학(蘭學)의 세례를 깊이 받은 인물은 4대 토모나오(藤塚知直)와 5대 도모아키(藤塚知明)이다.
먼저 후지츠카 가문의 학문을 세간(世間)에 알린 선각자는 4대 토모나오(藤塚知直)이다. 후지츠카 가문의 4~5대 부자(父子)가 활동한 시기는 18세기 후반에 해당한다.
나아가 6대 토모슈우(藤塚知周, 雅樂, 號 晋齋, 1766∼1802)는 박학다식하고 지방의 명가(名家)와의 교류에 부친의 명성을 유지하였다.
한편, 5대 도모아키(藤塚知明)의 셋째 아들인 타게시(俁, 호 頤庵, ?~?)는 난학(蘭學)의 대가(大家)였던 시의(侍醫) 마에노 료오타쿠(前野良澤, 1723~1803)의 양사자(養嗣子)가 입적되어 큐슈(九州) 중진후(中津侯)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후지츠카 가문은 불사리(佛舍利) 사건의 영향을 크게 입었다. 5대 도모아키(藤塚知明)는 1785년(天明 5)에 시오가마신사 별궁(別宮)의 미네요시(三禰宜)가 되었다.
이 무렵 시오가마신사에서는 별당사(別当寺)인 법련사(法蓮寺)의 지배력이 강하여 사승(社僧)은 신불습합(神佛習合)을 추진하여 전중(殿中)에 불사리(佛舍利)를 거두기도 하였다.
사가(社家)는 이에 강력히 반발하여 1791년(寛政 3)이 되자 이 대립은 센다이번(仙台藩)애 대한 직소(直訴)로 발전하였다.
1798년(寛政 10)에 소문이 나 사가(社家) 측의 주장을 인정받았으나 법련사를 업신여겼다고 하여 도모아키는 죄를 뒤집어썼다.
도모아키는 이 무렵 은거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사가측(社家側) 사람으로서 이 사건에 크게 관여아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사건은 불사리사건 또는 후지츠카 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 후 도모아키는 도뉴군(桃生郡) 가마타무라 우메노키(鹿又村梅ノ木)에 유폐(幽閉: 流謫)되었다.
도모아키의 신병(身柄)을 맡은 것은 센다이번 가신 (家臣) 세가미 쿄큐(瀬上景福)인데, 그는 도모아키의 학덕을 흠모하여 여러 명의 가신과 함께 도모아키에게 사사師事)받았다.
도모아키에게는 암자가 주어졌고, 그 생활은 자유로웠다. 결국 5대 도모아키와 6대 토모슈우 두 부자는 배소(配所)에서 사망하였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5대 후지쓰카 도모아키(藤塚知明, 式部, 1737~1799)가 약 10만 권에 달하는 명산장문고(名山藏文庫)를 설립하여 문교(文敎)의 보급에 노력하였고, 『해국병담(海國兵談)』의 저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를 비롯한 천하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는 점이다.
비록 가문문고는 미완에 그치기는 했으나, 가학(家學)의 면면한 흐름은 가문 문고(文庫)의 창설과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11대 아시타치바나(藤塚足橘)는 22살로 죽었으며, 후지츠카가(家)는 1897년(明治 30) 사사키(佐々木敬太郞)의 아우 치카시(鄰)를 양사자(養嗣子)로 맞았고, 이어 1902년(明治 35)에 사다(サダ)와 결혼하였다.
가문의 12대 치카시는 후에 경성제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아 일본 중국학의 태두(泰斗)로 이름이 높았지만, 거주지를 도쿄로 이전하여 시오가마와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시오가마가 낳은 학문하는 집안인 후지츠카 가문은 치카시 박사를 얻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고 시오가마시사(市史)는 쓰고 있다.
제2부에서는 18세기 서예가 동강원린(東江源鱗, 1732~96)이 쓴 「신수정(神樹亭, 후지츠카 구저택)」과 시오가마신사기, 신학변의, 등총식부대인전 등의 고서류, 그리고 「재축이방창(齋祝弍方暢)」, 「조서가(嘲書家) 7언시」 등의 시문류, 금석문과 궁시현도, 사자무도, 직인가합(職人歌合) 등의 자료를 감상할 수 있다.
제3부 후지츠카 치카시 교유 인물들의 글씨와 편지
정만조(鄭萬朝, 1858~1936)와 이한복(李漢福, 1897~1940), 청나라의 숙친왕(肅親王, 1866~1922), 학자 양종희(楊鍾羲, 1865~1939)와 나진옥(羅振玉, 1866∼1940), 그리고 지도교수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 1867~1939), 시오노야 온(鹽谷溫, 1878~1962) 등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들 대련 작품과 시문, 서첩과 편지 등은 한중일 학자와 정치인 등 폭넓은 후지츠카 치카시의 교유 범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의 교유 범위는 여기 소개되는 자료 이외에 훨씬 많고, 방대할 것이다.
그러니까 전시유물은 그 가운데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예를 들어 추사박물관 후지츠카 기증유물에는 그의 지도교수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 1867~1939)가 그에게 보낸 33통의 편지 두루마리(「핫토리 우노키치 수찰권(服部宇之吉 手札卷)」는 전시되지 못했지만, 자료의 완결성을 위해 연말에 번역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핫토리가 경성제대 총장으로 취임한 후 1923년 4월 1일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법문학부 근무와 중국철학 강좌 담임을 명 받아 4월 22일 부임한 것은 단적인 예이다.
제4부 후지츠카 치카시의 생애와 학문
후지츠카 치카시가 자필로 작성한 이력서는 2건이 남아있다. 한 점은 추사박물관 후지츠카 기증실에 걸려있는 1909년 작성된 것이며, 또 하나는 수장고에 보존하고 있는 1940년에 작성된 것이다. 후자는 6장에 이를 정도로 매우 상세한데, 여기에서는 신분을 ‘사족(士族)’으로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사족(士族)’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원래 무사 계급에 속한 자에게 주어진 족칭(族稱)으로, 화족(華族) 아래 평민(平民) 위의 신분이다. 물론 제2차대전 후에 폐지되었다.
여기에서는 치카시가 사용한 인장과 인보, 붓글씨, 최초의 저서인 『중용연구(中庸硏究)』, 원고지, 노트, 저서류 등을 살필 수 있다. 기획전시실 옆 후지츠카 기증실과 함께 감상하면 좋을 것이다.
특히 그의 인보집인 『망한려인상(望漢廬印賞)』은 32방의 치카시 관련 인장을 모두 수록하여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후지츠카 치카시의 장서 관련 연구서를 낸 정민 교수(한양대)의 표현대로, 책 보기를 즐기는 서치(書癡)였기에 고서에 많은 메모쪽지를 남겼다. 그는 쓰기보다는 읽기를 더 좋아했었던 듯하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남긴 붓글씨 가운데 「하고심재(何苦心齋)」는 의미심장하다. 낙관이나 서명은 없지만, 동아시아의 경학과 문화 교류라는 두 가지 연구 과제에 고심하던 그의 서재 ‘망한려(望漢廬)’가 떠올랐다.
이번 특별기획전의 개최를 통해 소략하지만 후지츠카에 대한 연구가 추사 김정희 중심에서 한 걸음 나아가 18~20세기 동아시아의 문화교류와 경학(經學), 근대 학제사, 지성사(知性史) 연구로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학계와 관심 있는 연구자들이, 따로 또 같이, 어깨 겯고 나아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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