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라는 사람이 있다. 백제멸망 당시 부흥군을 이끈 사람으로 그 후 당에 항복하여 그곳에서도 활동한 사람이다.
흑치상지의 성 "흑치黑齒"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중국에서 발견된 그의 묘지명에는 百濟人也。其先出自扶余氏,封於黑齒,子孫因以為氏焉。라 되어 있어 흑치는 지명으로 보인다.
원래 부여씨였지만 갈려 나왔으니 일본에서 흔히 보이는 바대로 "창씨'를 한 셈이 되겠다.
사실 "창씨"의 전통은 일본보다 백제에서 먼저 보이는 것 같아 어쩌면 일본 창씨 전통의 기원은 백제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흑치"에 관련하여 제시된 바 없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에서는 귀족들이 이빨을 검게 물들이는 풍습이 있어 심지어는 전국시대까지도 귀족 취향의 무사들은 이빨을 검게 물들이고 했다는데 실제로 겐페이 전쟁 당시의 헤이케모노가타리를 보면 당시 다이라씨는 귀족 취향이라 이빨을 검게 물들이고 다녔다고 한다. 이를 오하구로お歯黒 라고 부른다.
이 풍습은 에도시대에 오면 일반인들까지도 퍼져나갓지만 원래는 귀족아니면 할수 없는 풍습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일본에서는 이 お歯黒의 풍습을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믿는 경우가 있다. 흑치상지 역시 오하구로 전통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모르겠다.
わが国におけるお歯黒の歴史は古く、奈良時代に北方民族によって朝鮮半島から伝えれたといわれています。平安時代には貴族階級の間に広がり、男女ともに十七~十八歳で歯を黒く染め成人であることを表していました。その後、時代とともに染めはじめる年齢が低くなり、室町時代には十三~十四歳に、戦国時代になると武将の娘は早く政略結婚させるために八歳で染めていたといいます。今川義元の肖像画などをみると、成人男子でもお歯黒をしていたことがわかります。
아무튼 흑치상지는 우리에게는 백제부흥군 장수로 유명하지만, 흑치상지의 사위가 왜계 물부순物部珣 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物部珣은 사비시대 대표적인 왜계백제관료 집안의 후손이 아닌가 추측하는데, 그 역시 백제 멸망 후 흑치상지와 함께 당으로 끌려가 꽤 높은 벼슬을 살다가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는 순장군공덕기珣將軍功德記 가 발견되어 국내에도 학계에 보고되었는데, 아마 전문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안다. 소개할 겸 그 중 일부만 발췌하여 적어본다.
인용한 글에 원래 읽지 못하던 궐자는 물짜로 판명되어 물부장군 공덕기로 최종확정되었다.
谘故天龍寺者,兆基有齊,替虖隋季。藎教理歸寂,載宅茲山之奧,龕室千萬彌亙崖岊,因廠增修,世濟其美。夫其峰巒岌礏,丹翠含赮,灌木蕭森,濫泉觱沸,或叫而合壑喧嘩者,則參虛之秀麗也。雖緇徒久曠,禪廡荒闃,而邁種德者,陟降遐險,固無虛月焉。大唐天兵中軍副使右金吾衛將軍上柱國遵化郡開國公(闕)部珣,本枝東海,世食舊德,相虞不臘,之奇族行,太上懷邦,由餘載格,曆官內外,以貞勤驟徙,天兵重鎮,實佐中軍。於神龍二年三月,與內子樂浪郡夫人黑齒氏,即大將軍燕公之中女也,躋京陵,越巨壑,出入坎窞,牽攣莖蔓,再休再呬,迺詹夫淨域焉。於是接足禮已,卻住一麵,瞻覜(闕一字)曆,歎未曾有。相與俱時,發純善誓,博施財具,富以(闕一字)上,奉為先尊及見存姻族,敬造三世佛像,並諸賢聖刻雕(闕一字)相。百(闕一字)莊嚴,冀藉勝因,圓資居往,暨三年八月,功斯畢焉。夫作而不記,非盛德也。遵化公資孝為忠,(闕一字)義而勇,僬倅以國,蹇連匪躬。德立(闕一字)行,事時禮順,塞既清隻,人亦寧隻,大蒐之隙,且閱三乘。然則居業定功,於斯為盛,光昭將軍之令備,可不務虖?故刻此樂石,以旌厥問。其辭曰:(闕一字)鑠明德,知終至而。忠信孝敬,元亨利而。總戎衛服,要荒謐而。乘緣詣覺,歸(闕三字)
대당 금오위장군상주국개국공 물부순은 원래 동해에서 갈려나왔는데... 아내는 흑치씨인데 대장군연공 (흑치상지)의 둘째 딸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왜계 물부순이 백제인 흑치상지 사위가 될 수 있었을까? 다름 아니라 물부씨物部氏 는 웅진-사비시기에 유력한 왜계백제관료였기 때문이다.
원래 왜의 유력 씨족이었지만 백제로 들어와 정착한 물부씨는 백제와 흥망성쇠를 같이한 사람들이다. 물부순이야 말로, 당나라로 끌려갈때 "일본말이나 할줄 알았을지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아마 백프로 백제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높은 확률로 그의 장인 흑치상지와 함께 백제부흥군에 가담했다가 실패하고 당으로 귀순하여 그곳 장군으로 일생을 마쳐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일본문헌을 보면 왜계백제관료에 대한 백제왕의 신임은 매우 높았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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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은 진흥왕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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