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임나사현에 대한 글을 쓰고 백제에 대한 글도 적고, 문외한인 필자가 좀 무리를 했다.
그 까닭은 다음 이야기를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 일본에서 볼 때, 가야=임나다. 한국 쪽에서는 가야와 임나를 나누어 보는 시각도 있는 듯한데, 이 둘은 일본에서 보면 같다.
따라서 현재 일본 교과서 등지에서 가야라고 적어 놓은 판도는 과거의 "임나"를 이름만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2. 일본에서는 영산강유역을 "가야"라고 포함한 모습을 자주 본다. 특히 최근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분이 다수 발견되면서 그런 추세는 더 강화하는 듯하고, 대개 이런 시도를 할 때, 영산강유역에 상다리, 하다리, 모루를 갖다 놓는 일이 많다.
이들 지명은 일본서기에서 "임나사현"으로 나오는 곳이다. 따라서 일본 측에서 영산강유역까지 가야 영역을 늘려 놓는 까닭은 이 지역의 전방후원분을 임나의 시각에서 바라 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민족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주장 자체만을 볼 때 제대로 된 학설로서 받아들이기 힘든다.
지금까지 해방 이후 발굴 보고를 보면 분명히 가야는 가야이고 영산강은 영산강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일본의 일부 시각처럼 그렇게 가야 혹은 임나라는 이름으로 얼렁뚱땅 하나로 묶을 수 없다.
평소 세밀한 논리를 학풍으로 하는 일본 학계 패턴으로 볼 때 영산강 유역을 얼렁뚱땅 가야로 묶어 놓은 일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다.
이는 일본서기 기록을 여기에 어떻게든 묶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인데, 이 설은 시간이 흐르면 폐기될 것이라 본다.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3. 한국 학계의 경우 모루, 상다리, 하다리는 전라도 동부 지역으로 본다. 나는 이 주장이 맞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야문화권이라는 게 영산강과 구분이 안 될 정도도 아니고, 가야문화권이 지리산 너머까지 보이는 이곳이 임나사현이라고 주장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문제에서는 한국학계 시각이 옳다고 나는 본다.
4. 그렇다면,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를 마한의 발전의 연장선상에서 본다거나 마한인이 일본 문화를 받아들였다거나 하는 주장은 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전방후원분이라는 것이 그렇게 임의로 해석하기에는 일본 측이 열도 유적들을 대상으로 쌓아 놓은 학설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이런 방식의 해석으로는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에 대한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5. 현재 이 부분에 대해 한국학계 일각에서는 5말~6세기 초에 집중하고 있는 점, 영산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나왔다가 사라지는 점 등을 주목하여 동성왕~무령왕 대 왜계백제관료라고 보는 시각이 나오는 것 같다.
왜계백제관료라는 말은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문제겠는데, 어쨌건 중요한 점은 동성왕-무령왕이 일본에서 자라거나 일본과 관련이 깊은 인물로 이 두 왕이 즉위할 즈음에 이들의 국내기반이 굉장히 취약했고, 북쪽에서는 고구려 위협이 계속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동성왕-무령왕 즉위는 개로왕 직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라 보는데, 이들이 즉위한 것은 일본의 의도가 관철되었다기 보다는 백제 측 왕위 계승권문제 때문에 백제 내부의 필요에 의해 이들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것이 옳다고 본다.
바로 이 시점에서 왜계백제관료가 출현하는 것인데, 일본측 기록에도 존재가 확실히 보이고,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을 여기에 비정한다면 굳이 부정할 만한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6. 왜계백제관료라는 것은 야마토와도 일정 부분 관계가 있었을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그 정체성이 굉장히 복잡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이들은 기본적으로 백제에 충성한 사람들이다. 백제군과 함께 신라와 싸웠고 고구려와도 싸웠다. 백제왕의 이들에 대한 신뢰는 매우 높았을 가능성도 있다.
마치 오늘날 롯데 그룹처럼 "왜계백제관료" 안에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가족 구성원으로 들어와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 가족구성원의 일부는 심지어 동성왕-무령왕대, 곤지계 백제왕실과도 혈연적으로 묶여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동성왕-무령왕 당시 곤지계 백제왕실과 왜계백제관료는 말하자면 한몸처럼 움직이는 군신관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7. 서기 5세기 말-6세기 초,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은 일도양단, 간단히 해석하고 끝낼 정도로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한국과 일본 양측 모두 자신들의 욕망을 이 안에 투영하여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는데, 나오는 팩트 자체에 대해서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분석하겠다고 하는 자세가 양국 학자들에게 모두 필요하다고 본다.
8. 개인적으로 이 문제는 미궁에 빠져 수수께끼에 묶일 것 같지 않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완전히 규명될 시기가 올 것이라 본다.
P.S) 사실 한국학계에서는 이미 다 알고 있으리라 보지만,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을 임나와 묶어 이해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고리는 영산강 유역을 가야=임나로 보고 둘을 하나로 묶는 시각이다.
현재 일본 국정교과서도 모두 가야 판도에 영산강을 위치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누가 봐도 일본서기 시각에 따른 것으로 한국학계 고고학적 성과는 반영이 안 된 논리다.
한국학계는 "임나"를 "가야"로 일본 측이 바꿨다고 좋아하지 말고, 한국학계 고고학 성과를 적극 제시하여 영산강유역을 가야판도에서 완전히 분리해 내야 이 지역 전방 후원분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해 진다.
저 지역이 가야=임나로 들어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일본서기 류의 임나일본부적 관점이 이 문제에 끼게 되고 저 지역의 왜계문화는 백제의 통제가 받는 것이 아니라 야마토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쉽게 말해, 전라도 지역 전방후원분을 일본 측 무리스런 해석에서 자유롭게 하는 첫 발은, 이 지역을 가야로 묶어 놓은 일본측 시각을 우리 측 고고학 자료로 완전히 폐기하는 것에 있다.
이 부분이 관철되면 5말6초 전방후원분에 임나일본부를 자꾸 덧씌우는 시도의 90프로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P.S.2) 일본이 한반도 남부 고대사를 임나일본부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바라보는가를 판단할 척도는 가야 판도를 한국 측의 가야 영역 + 영산강유역까지 묶어 보느냐 아니냐에 있다.
이 두 개가 묶여 있으면 이름을 가야 아니라 가야 할아버지라 부른다고 해도 스토리라인은 일본서기에 기반한다.
영산강유역을 임나=가야에서 분리하는 것이 사실상 이 문제 첫 발로 현재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까지 "가야"라는 이름으로 위와 같은 그림의 지도를 실어 놓았는데, 이 지도의 수정을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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