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42대 왕(재위 826∼836). 처음 이름은 수종(秀宗)이지만 나중에 경휘(景徽)로 고쳤다. 헌덕왕 친동생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은 김씨다. 이름은 중희(重熙)인데 청명(淸明)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소성(昭聖)이며 어머니는 계화왕후(桂花王后)이다 신묘년에 즉위해 10년을 다스렸다. 원화(元和) 4년 기축 7월19일에 왕의 숙부인 헌덕(憲德)과 흥덕(興德) 두 이간(伊干)에게 시해되어 붕했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흥덕왕 : 흥덕왕(興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이 수종(秀宗)이었는데 나중에 경휘(景徽)로 고쳤다. 헌덕왕의 친동생이다. 겨울 12월에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자,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하였다. 왕이 [왕비] 생각을 잊지 못해 슬픔에 싸여 즐거워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글을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였다. “외짝 새도 제짝을 잃은 슬픔을 가지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차마 무정하게도 금방 다시 장가를 든다는 말인가?” 그리고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한 시녀들까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직 환관뿐이었다.<장화(章和)는 성이 김씨이고 소성왕의 딸이다.>2년(827) 봄 정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당나라 문종(文宗)이 헌덕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회를 폐하고 태자좌유덕(太子左諭德)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원적(源寂)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서 조문·제사하고, 왕위를 이은 임금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사지절(使持節) 대도독 계림주제군사(大都督 林州諸軍事) 겸 지절충영해군사(持節充寧海軍使)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대비(大妃)로 책봉하였으며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3월에 고구려 승려 구덕(丘德)이 당나라에 들어가 불경을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여러 절의 승려들을 모아 나가서 그를 맞이하였다. 여름 5월에 서리가 내렸다. 가을 8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서울에 큰 가뭄이 들었다. 시중 영공(永恭)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3년(828) 봄 정월에 대아찬 김우징(金祐徵)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눈이 세 자나 내렸다. 여름 4월에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張氏)인데,<일명 보고(保皐)라고도 하였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후에 본국으로 돌아와 왕을 찾아 뵙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淸海)를 지켰다.<청해는 지금[고려]의 완도(莞島)이다.> 한산주 표천현(瓢川縣)의 요망한 사람이 스스로 말하기를, 빨리 부자가 되는 술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홀렸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옳지 않은 도[左道]로써 여러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자를 벌하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다.”라 하고는 그 사람을 먼 섬으로 쫓아 버렸다. 겨울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문종이 인덕전(麟德殿)에 불러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어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善德王)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매우 성행하였다. 4년(829) 봄 2월에 당은군(唐恩郡)을 당성진(唐城鎭)으로 삼고 사찬 극정(極正)을 보내 가서 지키게 하였다. 5년(830) 여름 4월에 왕이 병환이 났으므로 기도를 드리고 아울러 15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겨울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년(831) 봄 정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시중 우징(祐徵)이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이찬 윤분(允芬)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에 왕자 김능유(金能儒)를 승려 아홉 명과 함께 당나라에 보내 조회하였다. 가을 7월에 당나라에 들어갔던 진봉사(進奉使) 능유 등 일행이 돌아오던 길에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겨울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7년(832) 봄과 여름에 가물어 초목이 말라 죽은 빈 땅[赤地]이 되었으므로, 왕이 정전(正殿)에 나가지 않고 평상시에 먹던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가을 7월에 비가 내렸다. 8월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겨울 10월에 왕이 사자로 하여금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8년(833) 봄에 나라 안에 큰 기근이 들었다. 여름 4월에 왕이 시조묘에 배알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다시 피었다.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었다. 11월에 시중 윤분(允芬)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9년(834) 봄 정월에 우징을 다시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서형산(西兄山) 아래 거둥하여 군대를 크게 사열하고, 무평문(武平門)에 나아가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나라 남쪽의 주와 군을 두루 돌면서 늙은이와 홀아비, 홀어미, 부모없는 어린아이, 자식없는 늙은이들을 위문하고 곡식과 베를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10년(835) 봄 2월에 아찬 김균정(金均貞)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재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글을 올려 관직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으므로 대아찬 김명(金明)을 시중으로 삼았다. 11년(836) 봄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있었다.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당나라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고 아울러 숙위하게 하였다. 여름 6월에 살별[星]이 동쪽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달을 침범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흥덕(興德)이라 하고, 조정에서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合葬)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42대 흥덕왕(興德王)은 김씨다. 이름은 경휘(景暉)인데 헌덕(憲德)의 모제(母弟)이다. 비는 창화부인(昌花夫人)이니 시호는 정목왕후(定穆王后)로서, 소성(昭聖)의 딸이다. 병오년에 즉위해 10년을 다스렸다. 능은 안강(安康)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다. 비 창화(昌花)와 합장했다.
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 : 후에 흥덕대왕이 공[유신]을 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책봉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김양 열전 : 김양(金陽)은 자가 위흔(魏昕)이고, 태종대왕 9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찬 주원(周元), 할아버지는 소판 종기(宗基), 아버지는 파진찬 정여(貞茹)이니 세력있는 집안으로써 모두 장수와 재상이 되었다. 양(陽)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걸출하였다. 태화(太和) 2년(828), 흥덕왕 3년에 고성군(固城郡) 태수(太守)가 되었고, 곧바로 중원(中原)[현재의 충북 충주시] 대윤(大尹)에 임명되었다가 조금 후에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옮겼는데, 맡는 곳마다 정무(政務)를 잘 다스린 명성이 있었다. 개성(開成) 원년 병진(흥덕왕 11년, 희강왕 원년: 836)에 흥덕왕이 돌아가고 적자(嫡子)가 없어, 왕의 4촌 동생 균정(均貞)과 4촌 동생의 아들 제륭(悌隆)이 왕위를 다투었다. 양(陽)이 균정의 아들인 아찬 우징(祐徵)과 균정의 매서(妹壻)인 예징(禮徵)과 함께 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가 족병(族兵)으로써 숙위하였다. 제륭의 무리 김명(金明)·이홍(利弘) 등이 와서 포위하자 양이 군사를 궁문에 배치하여 막으면서 “새 임금이 여기에 있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흉악한 반역을 할 수 있느냐.” 하고 드디어 활을 당겨 10여 사람을 쏘아 죽였다. 제륭의 부하 배훤백(裵萱伯)이 양에게 활을 쏘아 다리를 맞혔다. 균정이 말하였다.“저 편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형세를 막아 낼 수가 없다. 공은 짐짓 패한 척 물러가 뒷일을 계획하라.” 양이 이에 포위망을 뚫고 나가 한기(韓)<또는 한지(漢祗)로도 썼다.>의 시장에 이르렀을 때 균정은 난병(亂兵)들에게 죽었다. 양이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밝은 해를 가리켜 맹세하며, 아무도 모르게 산야에 숨어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삼국사기 권제33 (잡지 제2) 색복 : 흥덕왕 즉위 9년, 태화(太和) 8년(834)에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는 존비가 있어서, [그에 따라] 호칭[名例]이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른 것이다. 그런데 풍속이 점차 경박해지고 백성들이 사치와 호화를 다투게 되어, 오직 외래 물건의 진기함을 숭상하고 도리어 토산품의 비야함을 혐오하니, 신분에 따른 예의[禮數]가 거의 무시되는 지경에 빠지고 풍속이 쇠퇴하여 없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에 감히 옛 법에 따라 밝은 명령을 펴는 바이니, 혹시 고의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진실로 일정한 형벌이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흥덕왕(興德王)과 앵무새 : 제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은 보력(寶曆) 2년 병오(丙午; 826)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사람이 당(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자 홀로 남은 수놈은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는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 놓게 했더니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는 제 짝을 얻은 줄 알고 그 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앵무새를 두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가사(歌辭)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제5 효선(孝善) 제9 손순매아(孫順埋兒) : 손순(孫順. 고본古本에는 손순孫舜이라고 했다)은 모량리(牟梁里) 사람이니 아버지는 학산(鶴山)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니 어머니는 이름이 운오(運烏)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어 항상 어머니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이 민망하게 여겨 그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가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님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님은 굶주림이 심하시니 이 아이를 땅에 묻어서 어머님 배를 부르게 해드려야 겠소."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이산은 모량리牟梁里 서북쪽에 있다) 북쪽 들에 가서 땅을 파다가 이상한 석종(石鐘)을 얻었다. 부부는 놀라고 괴이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걸어 놓고 시험삼아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은은해서 들을 만하다. 아내가 말했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필경 이 아이의 복인 듯싶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남편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石鐘)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興德王)이 이 소리를 듣고 좌우를 보고 말했다. "서쪽 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는 것이 보통 종소리가 아니니 빨리 가서 조사해 보라." 왕의 사자(使者)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그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말했다.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그 아이를 묻자 땅 속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전세(前世)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순후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예전에 살던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모셔 두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서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아 있다. 그 종은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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