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38대 왕. 원성은 시호다. 이름은 경신(敬信)이고 나물왕(奈勿王) 12세손.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고, 왕비 김씨는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혜공왕 말년에 반역하는 신하가 발호하자 그것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권력자로 부상했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원성왕 : 원성왕(元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신(敬信)이고 나물왕(奈勿王)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고, 왕비 김씨는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일찍이 혜공왕 말년에 반역하는 신하가 발호하자 선덕(宣德)은 당시 상대등으로서, 임금 주위에 있는 나쁜 무리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서 주장했다. 경신도 여기에 참가하여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기 때문에, 선덕이 즉위하자 곧바로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아들이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후 왕의 조카뻘[族子]되는 주원(周元)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이때 주원은 서울[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서 주원이 건널 수가 없었다.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임금의 큰 지위란 본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周元)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敬信)은 전 임금의 아우로 본디부터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모를 가졌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단번에 일치되어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에 왕의 고조부 대아찬 법선(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증조부 이찬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할아버지 이찬 위문(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죽은 아버지 일길찬 효양(孝讓)을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삼고 아들 인겸(仁謙)을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의 두 사당을 헐고 시조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할아버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으로써 5묘(五廟)를 삼았다. 문무백관들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주고, 이찬 병부령 충렴(忠廉)을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이찬 제공(悌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제공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이찬 세강(世强))을 시중으로 삼았다. 3월에 전왕의 왕비 구족왕후(具足王后)를 바깥 궁으로 내보내고 조(租) 3만 4천 섬을 주었다.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고쳤다. 년(786) 여름 4월에 나라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모두 상하였다. 김원전(金元全)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덕종(德宗)이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신라 왕 김경신(金敬信)에게 조칙을 내린다. 김원전이 가지고 온 표문과 바친 물건들을 살펴보니 모두 잘 갖추어 있었다. 경(卿)의 나라 풍속은 믿음과 의리가 두텁고 뜻을 지킴이 곧고 순수하여 일찍부터 중국을 받들어 천자의 교화에 순종하였고, 번방을 편하게 하여 모두 유교의 유풍을 받아서 예법이 시행되고 나라 안이 평온하여졌다.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천자의 대궐로 향하고 천자에 조회하는 일을 빠뜨리지 아니하였으며, 자주 사신을 보내 윗대로부터 내려온 덕을 이어 조공과 진상을 잘 하였다. 비록 바다가 멀고 넓으며 길이 멀어도 예물을 가지고 왕래하는 데는 옛 법을 좇아 충성스러움이 더욱 돋보이니, 진실로 매우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는 바이다. 내가 온 세상을 다스리고 인민의 부모가 된지라, 안으로부터 밖에 이르기까지 법도를 맞게 하고 문화를 같이하여 태평화락을 이루고 다 함께 안락장수의 길에 오를까 한다. 경은 마땅히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부지런히 백성들을 돌보아 길이 번방의 신하[藩臣]가 되어, 바다 모퉁이에 있는 나라를 평온케 하라. 지금 경에게 나금(羅錦), 능채(綾彩)) 등 30필과 옷 한 벌, 은대접 한 개를 주노니 이르거든 받으시오. 왕비에게는 금채(錦彩), 능라(綾羅)) 등 20필과 금실로 수놓은 비단 치마 한 벌 및 은쟁반 한 개, 대재상(大宰相)) 한 사람에게는 옷 한 벌과 은주발 한 개, 차재상(次宰相)) 두 사람에게는 각각 옷 한 벌과 은주발 한 개를 주노니, 경이 받아서 나누어 주시오. 한여름이라 날씨가 몹시 더운데 경은 늘 평안하기를 바란다. 재상 이하 모두에게 아울러 안부를 전하는 바이다. 보내는 글에 나의 뜻을 모두 다 펴지 못하겠노라.』가을 7월에 가물었다. 9월에 서울[王都]의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벼 33,240섬을 내어서 진휼하였다. 겨울 10월에 또 벼 33,000섬을 내어 나누어 주었다. 대사 무오(武烏)가 병법(兵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으므로, 굴압현령(屈押縣令))의 관직을 주었다.3년(787) 봄 2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몸소 신궁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5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8월 초하루 신사에 일식이 있었다. 4년(788) 봄에 처음으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제정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예기(禮記) 또는 문선(文選))을 읽어서 그 뜻에 능통하고 아울러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에 밝은 사람을 상품(上品)으로 하고, 곡례(曲禮))·논어·효경을 읽은 사람을 중품(中品)으로 하였으며, 곡례와 효경을 읽은 사람을 하품(下品)으로 하였다. 만약 오경(五經))과 삼사(三史)) 그리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에 두루 능통한 사람은 등급을 뛰어 넘어 이를 등용하였다. 전에는 단지 활쏘는 것으로 인물을 선발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고쳤다. 가을에 나라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누리가 발생하였으며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안정시켰다. 5년(789) 봄 정월 초하루 갑진에 일식이 있었다. 한산주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곡식을 내어 진휼하였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楊根縣) 소수(小守))로 삼으니 집사 사(執事史)) 모초(毛肖)가 논박하여 말하였다. “자옥은 문적(文籍)으로 등용되지) 않았으니 지방 관직을 맡길 수 없다.” 그러자 시중이 말하였다. “비록 문적으로 등용되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학생이 되었으니 써도 좋지 않겠는가?” 왕은 이 말을 좇았다. 사론(史論): 오직 학문을 한 다음에 도리(道理)를 듣게 되고, 도리를 들은 뒤에야 사물의 근본과 말단을 밝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배운 뒤에 벼슬을 한 사람은 일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것을 먼저 하게되므로 말단은 저절로 바르게 된다. 비유하면 그물의 벼리[網] 하나를 추켜 들면 모든 그물의 고[目]가 따라서 모두 바르게 되는 것과 같다. 학문을 하지 못한 자는 이와 반대로 일의 선후(先後)와 본말(本末)의 순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자질구레하게 정신을 지엽말단에만 기울여, 백성들로부터 긁어 모으는 것으로써 이익을 삼고 혹은 까다롭게 검찰하는 것으로 서로 높다고 하므로 비록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려고 하나 도리어 해가 된다. 이런 까닭에 학기(學記))에는 『근본을 힘쓴다.』는 말로 마쳤고, 상서(尙書)에는 『배우지 아니하면 담벽에 얼굴을 맞댄 것만 같아 일에 당해서는 오직 답답할 뿐이다.』)라 말하였으니 집사(執事) 모초(毛肖)의 한마디 말은 만대(萬代)의 모범이 될 만하다고 하겠다. 6년(790) 봄 정월에 종기(宗基))를 시중으로 삼았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였는데, 전주 등 일곱 주(州)의 사람을 징발하여 공사를 일으켰다.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3월에 일길찬 백어(伯魚)를 북쪽 나라[北國])에 사신으로 보냈다. 크게 가물었다. 여름 4월에 금성[太白]과 진성(辰星))이 동정(東井))에 모였다. 5월에 곡식을 내어 한산주와 웅천주 두 주(州)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7년(791) 봄 정월에 왕태자가 죽어 시호를 혜충(惠忠)이라 하였다. 이찬 제공(悌恭)이 반역하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웅천주의 대사 향성(向省)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겨울 10월에 서울에 눈이 세 자 내렸고, 얼어 죽은 사람이 있었다. 시중 종기(宗基)가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대아찬 준옹(俊邕))을 시중으로 삼았다. 11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내성 시랑(內省侍郞) 김언(金言)을 삼중아찬으로 삼았다. 8년(792) 가을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김정란(金井蘭))을 바쳤다. 그 여자는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미인으로 몸에서 향내가 났다. 8월에 왕자 의영(義英))을 태자로 봉하였다. 상대등 충렴이 죽었으므로 이찬 세강(世强)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준옹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이찬 숭빈(崇斌))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초하루 임자에 일식이 있었다. 9년(793) 가을 8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벼가 쓰러졌다. 나마 김뇌(金惱)가 흰 꿩을 바쳤다. 10년(794) 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태자 의영(義英)이 죽어 시호를 헌평(憲平)이라 하였다. 시중 숭빈이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잡찬 언승(彦昇))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봉은사(奉恩寺))를 처음으로 세웠다. 한산주에서 흰 새를 바쳤다. 궁궐 서쪽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11년(795) 봄 정월에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俊邕)을 태자로 봉하였다. 여름 4월에 가물었으므로 몸소 죄수들의 정상을 살폈다.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12년(796) 봄에 서울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번졌으므로 왕이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여름 4월에 시중 언승을 병부령으로 삼고 이찬 지원(智原))을 시중으로 삼았다. 13년(797) 가을 9월에 나라 동쪽 지방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고, 홍수가 나서 산이 무너졌다. 시중 지원이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아찬 김삼조(金三朝))를 시중으로 삼았다.14년(798) 봄 3월에 궁궐 남쪽의 누교(樓橋)에 화재가 났고,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이 마주 부딪쳤다. 여름 6월에 가물었고 굴자군(屈自郡))의 대사 석남오(石南烏)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겨울 12월 29일에 왕이 죽어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였다. 유언에 따라 널을 들어 봉덕사 남쪽에서 불태웠다.)<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정원(貞元) 14년(798)에 경신(敬信)이 죽었다.』) 하였고, 통감(通鑑)에는 『정원 16년(800)에 경신이 죽었다.』)고 하였는데 본사(本史)로써 상고해 보면 통감이 잘못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39대 원성왕(元聖王)은 김씨다. 이름은 경신(敬愼)인데 경신(敬信)이라고도 한다. 당서(唐書)에는 경즉(敬則)이라 했다. 아버지는 효양(孝讓) 대아간(大阿干)이며 명덕대왕(明德大王)에 추봉됐다. 어머니는 인=(仁□)인데 지오부인(知烏夫人)이라고도 하는데 시호는 소문왕후(昭文王后)이니, 창근(昌近) 이간의 딸이다. 비는 숙정부인(淑貞夫人)이니 신술(神述) 각간 딸이다. 을축년에 즉위해 14년을 다스렸다. 능은 鵠寺에 있는데 지금의 숭복사(崇福寺)이니, 치원(致遠)이 지은 비가 있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소성왕 : 소성왕(昭聖王)<소성(昭成)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준옹(俊邕)이며 원성왕(元聖王)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이고 왕비는 김씨 계화부인(桂花夫人)인데 대아찬 숙명(叔明)의 딸이다. 원성대왕 원년에 아들 인겸을 태자로 봉했으나 7년에 이르러 졸하므로 원성왕이 태자의 아들을 궁중에서 길렀다. 5년에 사신으로 당에 갔다 와 대아찬 관등을 받았고, 6년에는 파진찬으로 재상이 되었으며, 7년에 시중이 되었고, 8년에는 병부령이 되었다. 11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원성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애장왕 : 애장왕(哀莊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청명(淸明)으로, 소성왕의 태자이고 어머니는 김씨 계화부인(桂花夫人)이다. 즉위할 때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아찬 병부령 언승(彦昇)이 섭정하였다. 처음에 원성왕이 죽자 당나라 덕종(德宗)이 사봉랑중(司封郞中)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위단(韋丹)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서 조문하고, 또 왕 준옹(俊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케 하였으나, 위단이 운주(州)에 이르렀다가 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만 되돌아갔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희강왕 : 희강왕(僖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제륭(悌隆)이다.<또는 제옹(悌顒)이라고도 하였다.> 원성대왕 손자 이찬 헌정(憲貞)<초노(草奴)라고도 한다> 아들이고 어머니는 포도부인(包道夫人)이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신무왕 : 신무왕(神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우징(祐徵)이니, 원성대왕 손자인 상대등 균정(均貞) 아들이고 희강왕 사촌 아우다. 례징(禮徵) 등이 궁중을 깨끗이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원성대왕(元聖大王) :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이 맨처음에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角干)으로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는데, 꿈이 복두(복頭)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복두(복頭)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이때 아찬(阿飡) 여삼(餘三. 어떤 책에는 여산<餘山>이라 했다)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아찬이 다시 청하여 한 번 뵙기를 원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니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일을 자세히 말하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하고 말한다. "이는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고 아찬에게 해몽(解夢)하기를 청하니 아찬은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이 말한다.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아찬이 "비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하니 이에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이 북천(北川)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따라 새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길몽(吉夢)이 맞은 것이었다. 주원이 명주(溟洲)에 물러가 살았다. 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 여산(餘山)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헌평태자(憲平太子)·예영잡간(禮英잡干)·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이다. 대왕(大王)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노래는 없어져서 자세치 못하다)를 지을 수가 있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던 것이다. 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왕 문덕文德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인 듯하다. 그 밖에 문경文慶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王의 태자太子라고 했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리고 금(金)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청하므로 왕이 사자에게 일렀다. "나는 들으니 상대(上代)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000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하였다. 왕은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은(銀) 3,000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보내 온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수해 두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唐)나라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갔는데,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廷)에 나와서 아뢴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 청지靑池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 샘은 동해東海의 용龍이 왕래하면서 불법佛法을 듣던 곳이요 절은 진평왕眞平王이 지은 것으로서 오백五百 성중聖衆과 오층탑五層塔과 전민田民까지 함께 헌납했다고 했다)에 있는 두 용(龍)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龍)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 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각각 물 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하면서 가 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明哲)함에 감복했다. 어느날 왕이 황룡사(皇龍寺; 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라 했고, 또 금강사金剛寺라고도 했으니 이것은 아마 절 이름과 불경佛經 이름을 혼동한 것인 듯싶다)의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華嚴經)을 50일 동안 외게 했다. 사미(沙彌) 묘정(妙正)이 매양 김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가 이 이름을 지었다) 가에서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떴다가는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할 무렵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그런 지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묘정에게 주려는 것같이 하므로 묘정은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大王)은 묘정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 때 잡간(잡干)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도 묘정을 사랑해서 같이 가기를 청하자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들이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의 황제(皇帝)도 역시 묘정을 보자 매우 사랑하게 되고 승상(丞相)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관상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니 하나도 길(吉)한 상(相)이 없는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틀림없이 이상한 물건을 가졌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몸을 뒤져 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매달려 있다. 황제는 말한다. "나에게 여의주(如意珠) 네 개가 있던 것을 지난 해에 한 개를 잃었는데 이제 이 구슬을 보니 내가 잃은 그 구슬이다." 황제가 묘정에게 그 구슬을 가진 연유를 물으니 묘정은 그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황제가 생각하니 구슬을 잃었던 날짜가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과 똑같다.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아 두고 묘정을 돌려보냈더니 그 뒤로는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왕의 능(陵)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崇德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고, 조부(祖父) 훈입잡간(訓入잡干)을 추봉(追封)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曾祖) 의관잡간(議官잡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 하고, 고조(高祖)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잡간(摩叱次잡干)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무장사(鍪藏寺) 미타전(彌陀殿) : 서울 동북쪽 20리 쯤 되는 암곡촌(暗谷村) 북쪽에 무장사(鍪藏寺)가 있으니, 이것은 신라 제38대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아버지 대아간(大阿干) 효양(孝讓), 즉 추봉(追封)된 명덕대왕(明德大王)의 숙부 파진찬(波珍飡)을 추모(追慕)해서 세운 것이다. 그윽한 골짜기가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세운 듯하다. 그곳은 깊고 어두워 저절로 허백(虛白)이 생길 것이니, 이야말로 마음을 쉬고 도(道)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김경신金敬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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