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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별로 유별날 것 없는 동네의 조선시대 호적을 봐도
1700년대에는 소위 양반에 속할 호주의 아래에 평균 5-6명의 노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8세기 초까지도 노비 비율이 40프로는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필자가 직접 본 어느 동네의 조선시대 호적도 그랬다.
1700년대 초반, 그 동네에는 인구의 상당수가 노비였다.
이 시대가 언제인고 하니 숙종 연간이다.
숙종 임금의 시대까지도 우리나라에는 인구의 상당수가 노비였던 셈이다.
1700년대 중후반을 넘어서면서 노비의 숫자가 급감하는 것 같으니
대체로 영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마을의 인구 구성은 급변한 것 같다.
같은 동네의 1800년대 초반 호적을 보면
동네가 완전히 달라져 있다.
노비는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1700년대까지도 몇 안 되는 호주가 가족과 노비를 거느린 대가족이었던 것이
거의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왕조가 농민들을 "수탈"했다고 생각하는데,
1700년대 초반까지도 이건 "수탈"이라기 보다는 "노비사역"이었던 셈이다.
자립한 농민이 있어야 "농민수탈"이 있을 것 아니겠나?
1800년대 호적을 보면 자립 농민이 상당히 늘어나 있는 것을 보는데
이때는 이미 지주-전호제로 재편되었던 것이 아닐까.
공노비 해방은 순조 원년 (1801년)에 이루어졌는데
1800년대 초반의 호적을 보면 왜 이 시기에 공노비 해방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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