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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노년의 연구

19세기 중엽 호적의 "한량"

by 신동훈 識 2025.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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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호적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량閑良"이 무척 많다. 

한량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원래 이렇게 많은 직역이 아니었다. 

18세기 이전에도 향촌사회에는 양반과 평민의 중간층인 소위 "중인"이 있었는데

주로 서얼로 이루어진 이들은 세상이 만만해지면 유학幼學을 받아가도 

좀 빡세지면 업무業武나 업유業儒를 받았다. 한량은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이 되면 업무나 업유는 별로 없고

한량이 무지 많다.

유학과 함께 전체를 반분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검안 자료는 구한말의 자료로 호적 때보다는 약 20-30년 정도 뒤의 사회인데, 

이 검안자료에는

유학은 꽤 나오지만 한량은 잘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는 "양인良人"이 나온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의 호적에는 양인으로 볼 만한 직역이 잘 나오지를 않는다. 

대신에 그 자리에는 "한량"이 있다. 

19세기 중반의 "한량"이 곧 구한말 검안자료의 "양인"일까? 

그렇다면 19세기 중반 호적의 "한량"은 유학까지 올라가지 못한 평민, 혹은 노비들 후손이 있을 수 있겠다. 

한량 중에는 부모 이름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던 것을 보면

이전까지 노비였던 이들은 이 시기에 대거 한량을 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19세기 중반의 호적으로 보는 조선사회는

위로는 유학, 아래로는 한량이 전체를 양분하고 있었던 셈인데 

검안 서류에는 "한량" 대신 "양인"으로 기재한것 일까? 

어쨌건 18세기 중반 호적에서 "한량"은 "유학"의 아래 직역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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