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 회고록 두 편을 독파했다
개중 하나가 안호상 선생 자서전이라
이 양반 양반 사족에 1902년 1월 출생이라 부잣집인 까닭에 집에서 돈 훔쳐 야반도주하다시피 해서 서울 유학하고 그걸로 만족치 못하고는 중국으로 들어가 전전하다 상해로 가서 독일어학교 나오고
다시 그걸로는 성이 안 찬다 해서 중국여권 맹글어 배타고 유럽으로 들어가 독일 명문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종교도인 그는 귀국해서는 인촌 김성수를 면담하고는 보성전문 교수가 되었고 그 길에 춘원 만나 모윤숙 시집을 보고는 그에게 반해 고향에 처자식 있는데도 버리고 모씨와 재혼해서 딸을 낳았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는가 하면 경찰에 불려가 열라 터졌고
해방 정국에선 서울대 교수로 갔지만 나찌즘 신봉자 우익이 웬일이냐 해서 반대에 부닥쳐 다시 곤욕을 치렀고 초대 교육부장관인가 되어서는 한글전용과 단기 사용을 밀어부쳤다.
그가 우파 민족주의자임은 확실하나 친일행적은 발견되지 않으니, 지조를 지킨 민족주의자임은 부인할 수 없거니와, 그러면서도 그외는 다른 길을 걸은 마누라 모윤숙에 대해선 그럴수밖에 없는 곡절이 있었다고 변호한다.
집에도 알리지 않고 금강산으로 피신했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고 거기서 또 남북분단을 경험하고 귀가한 그에겐 이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대에 독일 관념철학을 공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그의 회고록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다.
직전엔 전에 예고한 양사성 회고록을 독파했으니 그러고 보니 양사성은 1901년 4월생이라, 안호상보다는 생일이 8개월 빠르다.
그 유명한 양계초 아들로 중국 건축사 초석을 닦은 양사성이 중일전쟁이라는 간난을 뚫고서 각지 현지조사를 초인적으로 감행하고 중국 건축사는 내가 쓰고 말리란 신념 하나를 관철해가는 과정은 피눈물을 자아낸다.
누군가 아버지 얘기를 하는데 정작 자신은 아버지 글을 읽은 적이 없어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고 고백한다.
청화대학 건축과를 만들어 중국건축사 초석을 놓은 그는 주자파로 몰려 갖은 굴욕과 압박 속에서 문화대혁명의 회오리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정윤희를 닮은 첫부인 임휘인과의 애뜻한 사랑, 그리고 재혼한 부인이요 회고록 집필자인 임수와의 재혼과 갈등, 굴곡 많은 중국근대사만큼 그 자신 역시 굴곡이 적지 않았으니, 그런 삶을 살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양계초가 남긴 최고의 유산은 음빙실집인 줄 알았으나, 이 회고록을 읽다보니, 양사성이더라.
***
양사성 회고록에 대해서는 앞선 다음 글이 있다.
양계초와 양사성 부자 일화로는 다음 글 참조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 종손, 종법의 으뜸 (0) | 2020.01.26 |
---|---|
유희석을 째려보는 이국종 (0) | 2020.01.25 |
[읽을만한책] 조성금 《천산 위구르 왕국의 불교회화》 (0) | 2020.01.24 |
이른바 초두鐎斗 사용 일례一例 (1) | 2020.01.24 |
흑돼지 고장 지례초등학교 교정의 장학기념비 (0) | 2020.01.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