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중반까지 일본의 태평양전쟁 최대판도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의 승전으로 미국은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일본 해군은 여전히 건재했다.
이 시기에 조선에서는-.
3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미국, 영국, 소련 측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
일제, 일반 가정의 금속 공출 시작.
4월 18일 -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 지미 둘리틀 중령의 지휘하에 16대의 미국 B-25 폭격기 16대가 일본의 주요도시를 폭격한 이른바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이 실행됨.
5월 - 잡지 <삼천리>가 <대동아>로 제호를 바꾸고 민족지에서 친일지로 전향
조선어학회 잡지 <한글>이 통권 93호로 폐간
5월 8일 - 일제, 조선에 징병제 실시 결정
5월 15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에 편입
5월 29일 - 일제, 고이소 구니아키를 신임 조선 총독으로 임명
6월 5일 -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중 하나인 미드웨이 해전발발
6월 12일 - 제2차 세계 대전:미드웨이 해전종료
7월 중국 연안에서 김두봉 등이 조선독립동맹 조직
국민총력연맹, 가정의 유기그릇 공출 지시
7월 6일 - 이승만,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연설
9월 - 광복군총사령부, 중국 시안에서 충칭으로 본부 이전
10월 1일 - 최현배, 이극로, 이희승 등 학자 30여 명,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
11월 20일 - 일제, 조선징병제도 실시요강 결정
12월 20일 - 한국 최초로 노기남 주교 임명
성서조선 필화 사건. 김교신, 함석헌, 유달영 등 투옥됨.
1940년 이후 만주일대의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은 이미 정지된 상태였다.
따라서 1942년은 흔히 생각하는 "만주벌판에서 말 달리는 독립전쟁"의 시기는 더이상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1942년 중반까지 일본은 미국에 태평양전역에서 밀리지 않고 있었다.
미드웨이해전이 종료되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가 42년 6월이다.
이해에는 임정이 광복군을 창설하여 중국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지만, 일본군에 밀려 충칭으로 이전한 시기이고,
이승만은 미국에서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태평양전쟁 전황을 단파방송으로 알린 시기이기도 하다.
아직 조선징병제도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금명간 개시될 것임이 확실해진 시기였고,
조선어학회, 성서조선 필화사건 등으로 다수 조선인 지식인이 구속되기도 했다.
1942년은 일본이 진주만 공격 후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권"을 명분으로 내세워 미국과 각축전을 벌여
일제말 친일로 돌아선 사람들이 크게 동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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