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지도' X선으로 촬영했더니…"내부 상태 양호해 기적적"
송고 2025-05-20 16:25
박상현기자
日나라국립박물관, 문자 연구도 추진…내달까지 특별전서 공개
'칠지도' X선으로 촬영했더니…"내부 상태 양호해 기적적" | 연합뉴스
(도쿄=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 약 1천600년 전 백제가 만들어 일본에 전달한 문화유산 '칠지도'(七支刀)를 X선으로 촬영한 결과 내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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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식이 연합뉴스 동경특파 박상현 기자 보도로 타전됐거니와
그 저본이라 할 만한 일본 언론 보도 중 조일신문朝日新聞, 곧 아침햇살 신문, 아사히신문을 인용해 그 전문을 소개한다.
国宝・七支刀、初のCT調査 不鮮明だった文字の一部がくっきりと
5/20(火) 17:00配信
奈良・石上(いそのかみ)神宮に伝わる国宝「七支刀」(4世紀)のX線CT(コンピューター断層撮影)調査が初めて実施され、金象眼の銘文がくっきりと浮かび上がった。不明瞭だった文字の一部が鮮明になり、日本の古代史を知る貴重な手がかりとなる銘文の研究がいっそう進むことが期待される。
【写真】七支刀のX線CT調査で鮮明になった文字
七支刀は、両側に3本ずつ枝刃を持つ特異な形の鉄剣。表裏に計62文字の銘文(一部欠損)があり、朝鮮半島の古代国家・百済(くだら)の王族が倭(わ、日本)の王に贈るために作ったと記される。軍事をつかさどった豪族・物部氏の氏神である石上神宮に伝わってきた。
調査は、作られてから1600年以上がたつ七支刀の「健康診断」として奈良国立博物館が実施。CT画像には、一部がさびに覆われて読みづらく、別の文字とする説もあった百済の「済」の字が鮮明に写っていた。
また、多くの研究者が中国の元号「泰和(=太和)四年」(369年)と読んできた七支刀の制作年は、「和」の残りが悪いため、「泰始四年」(468年)とする説もあった。今回、象眼が脱落した「のぎへん」の痕跡がより明確に見えたことから、「泰和」の可能性がさらに高まった。
七支刀はX線写真が過去に撮られたことがあるが、両面の銘文が重なって文字が読みづらかった。CTは対象をスライス状に撮影するため、表と裏の銘文を別の画像で読むことができたという。
製法を巡っても、鉄素材をたたき延ばす鍛造か、鋳型に溶けた鉄を流して成型する鋳造かが議論になっている。CT画像から、剣身に枝刃を後からつなぎ合わせた痕跡は認められなかったが、鍛造か鋳造かの判断は、専門家を交えて詳細に検討する必要があるという。
今回の調査で、深刻な劣化や亀裂などは見つからなかった。奈良博の吉沢悟・学芸部長は「新しい文字の発見には至らなかったが、象眼された文字の鮮明な画像が得られた。今後の古代史研究に役立てられれば」と話す。
七支刀は、奈良博で開催中の特別展「超 国宝―祈りのかがやき―」(朝日新聞社など主催、6月15日まで)で公開している。CT画像と文字の判読結果は会場でパネル掲示される。(今井邦彦)
朝日新聞社
국보·칠지도 첫 CT조사 불선명한 글자 일부 선명하게
5/20(화) 17:00 배포
나라奈良 석상신궁石上神宮[이소노카미 신쿠]에 전하는 국보 칠지도七支刀(4세기)를 처음으로 X선 CT(컴퓨터 단층 촬영) 조사한 결과 금 상감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를 통해 그간 불분명한 글자 일부가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일본 고대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될 명문에 대한 연구가 한층 더 진행될 것으로 기대한다.
칠지도는 양쪽에 3개씩 가지날을 지닌 특이한 형태 쇠칼이다.
앞면과 뒷면에 모두 62자 글자(일부는 결손됐다)이 있고, 한반도 고대국가 백제 왕족이 왜 왕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적혔다.
군사를 담당한 호족 모노베씨物部氏 씨족 신사인 이시가미 신궁에 전해진다.
이번 조사는 국보를 넘어[초국보超國寶] 특별전 개최와 그에 맞물린 출품에 즈음해 나라국립박물관이 시도했다.
이번 조사 결과 특히 그간 녹으로 덮여 읽기 곤란했던 데다 논란이 많은 글자가 백제百濟의 제濟 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고 박물관은 전했다.
나아가 만든 시점을 표시하는 연호 부분과 관련해 '태화 4년泰和四年] 중 유독 '和'는 글자가 분명치 않아 논란이 적지 않았지만 이번 판독을 통해 和임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증거를 포착했다고 박물관은 전했다.
저 泰和는 실제 중국에서는 太和라는 글자로 사용한 연호로, 太나 泰는 결국 같은 大를 의미하는 글자이며 발음까지 거의 같아서[중국에서는 달리 발음할 수도 있지만, 저 시대 정확한 발음은 알기 어렵다] 흔히 번갈아 사용하기도 했다.
이번 판독을 존중한다면 泰和四年은 곧 太和四年이 되고, 절대연대로 환산하면 서기 369년이 된다.
이때가 백제로는 근초고인가? 근구수인가일 것이다. 연표 찾아보면 되지만 귀찮다.
그간 이 부분은 和에 해당하는 글자가 분명치 아니해서 始라 읽기도 했으니, 泰始 4년이 되면 서기 468년이 되어 이걸 왜국에 보낸 주체는 개로왕이 된다.
칠지도는 기존 엑스레이 촬영을 이전에 시도하고 그 도판이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CT 촬영을 한 까닭에 좀 더 확실히 글자를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번 주말 내가 현장을 가므로 이노우에 관장께 궁금한 점들을 문의해 보려 한다.
제조법을 놓고서도 벌겋게 달구어 두들겨 패서 만든 단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거푸집에 쇳물을 디립다 부어 만든 주조에 의한 것인지 논란이었다.
글자로 보면 백 번이나 담금질을 했다 했으니 단조여야 한다.
단조가 아닌 데도 저리 썼다면 백제가 사기친 것이다.
다만 이번 CT 조사에서는 이를 단안할 직접 판단은 유보했다.
본인들도 자신이 없으니 전문가 검토에 넘긴 셈이다.
건강 진단을 표방한 이번 조사 결과 심각한 열화나 균열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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