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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1절 80주년의 사건> (6) 현승종 사태를 두고 한판 붙은 염소수염과 핏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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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합뉴스 인터뷰가 건국대 안팎에서 심각한 권력투쟁 양상으로 발전할 줄이야, 현승종도 몰랐고, 나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인터뷰가 공개되자마자, 그를 이사장직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노골화했다. 이로 볼 때, 1993년 이래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현승종이 건국대 내부에서 적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식민지시대 말기 그의 학도병 강제징집과 그에서 비롯되는 일본군 생활기간 소위 복무 사실은 건국대 교수협의회와 직원노조, 총학생회 등을 자극한 기폭제가 되었으니, 이들은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는 현승종에 대해 이사장 사퇴 압박을 노골적으로 가하기 시작했다. 소위 복무 사실이 친일행위라는 것이었다. 


이런 압박에 시달린 현승종은 결국 인터뷰 기사가 나간 지 대략 2개월 만인 1999년 4월 20일 사의를 표명하기에 이른다. 내가 살다 살다 별꼴 다 봤지만, 이런 황당한 일은 나로서는 더더구나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인터뷰를 현승종이 자청한 것도 아니요, 이런저런 취지에서 연합뉴스가 기획한 특집 기사 일환으로, 연합뉴스가 부탁해서 행한 것이고, 더구나 그런 자리를 빌려서 그가 그간 공개하기 힘든 개인사 일단을 풀어놓았을 뿐이거니와, 더구나 그것을 풀어놓으면서 그것을 자랑한 것도 아니요, 부끄러운 마음이 있음을 고백한 마당에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나로서는 더욱 환장할 노릇이 사태가 저리 돌아가는 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젖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실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염소수염 한홍구





이 사태는 이후 또 다른 논쟁을 양산하기도 하는데, 역사학도 한홍구와 정치인 정청래가 이 사안을 두고 대판 논쟁을 벌인 일도 있었다. 저명한 한국학 전문 출판사 일조각 창립자 한만년 아들이기도 한 한홍구는 2001년 4월 24일 발간된 《한겨레21》 제356호에서 기고한 '한홍구의 역사이야기'에다가 <‘친일파’에 관한 명상>이라는 글을 기고하거니와 그에서 한홍구는 현승종 사태를 거론했으니, 해당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친일파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설정된 것도 또 하나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두 가지 면에서 보아야 할 것인데, 하나는 친일파들이 권력을 잡아온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과 다른 하나는 해방 당시의 역사적 분위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후자의 예로는 얼마 전 건국대 이사장 선임 당시 학생들의 반대를 받았던 현승종씨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노태우 정권 아래서 총리를 지낸 현승종씨의 경우, 학생들이 그의 이사장 취임을 반대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반대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첫 번째로 현승종씨가 일제 말기에 학병으로 나간 친일파이기 때문에 민족 건대의 이사장에 취임할 수 없다는 것을 들었다. 학생들은 형식상 지원제인 학병에 나간 것을 친일 행위로 본 것인데, 이는 해방 당시의 정서와는 큰 거리가 있다. 물론 학병에 지원한 사람들 중에 황국신민 의식이 골수에 박혀 스스로 자원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학병을 대부분 끌려간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학병 출신들은 일제 통치의 희생자로 간주되었고, 해방 정국 초기에 학병동맹을 결성하여 미군정의 탄압으로 해산될 때까지 진보진영 내에서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당시에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신분에다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자였다는 위치를 겸하여 일제 잔재 청산에 목소리를 높였다. 학병동맹의 위세는 대단했다. 학병동맹은 학병거부자동맹 앞에서야 한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밖의 다른 모든 정치단체 앞에서는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염소수염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인 한홍구는 이 기고문을 2003년 2월에 발간한 단행본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대한민국史》(한겨레신문사)에 포함한다. 정청래가 이 책을 본 모양인데, 그에 실린 글 중에서도 유독 현승종 관련 언급이 못마땅했던 듯, 작심한 듯 이 대목을 물고 늘어지면서 한홍구를 비판한다. 


정청래는 2003년 2월 24일 오마이뉴스에 <한홍구 교수의 '현승종사건' 인식에 대해 [주장] 저서 <대한민국사>에서 언급한 건국대생들의 오류 주장에 대한 반론>이라는 글을 투고했으니,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역사가들의 창을 통해 역사를 배운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소명의식을 갖고 글쓰기를 해야한다. 그 글쓰기의 첫단추는 사실의 정확한 취재를 바탕으로 해야함은 그래서 너무도 당연하다"는 언급으로써 글을 시작한다. 이 기고문은 현승종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엿보게 하는 귀중한 증언들이 있어 이런 대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핏대 정청래




먼저 필자(정청래-인용자)부터 말하자면 나는 당시 건국대 졸업생의 신분으로 민주동문회(청년건대) 회장 자격으로 ‘현승종 이사장 퇴임을 위한 범 건국인 비상대책위(이하 ‘비대위’) 집행위원장이었다. 당시 이 문제가 불거진 것은 현승종씨가 99년 <연합뉴스>와의 3·1절 기념 인터뷰에서 본인이 일제말 일본군 장교임을 고백하면서였다. 이 문제가 알려지자 건국대 구성원들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설립자 사진 밑에 어떻게 일본군 장교출신 현승종씨가 이사장으로 앉아있을 수 있는가, 그 어울리지 않음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동문교수협의회를 필두로 문과대 농과대 교수들이 반대성명을 낸 것에 이어 전체교수협의회 결의로 반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교직원노동조합 성명, 건국대 역대 총학생회장협의회, 이어 졸업생들로 구성된 청년건대 성명이 있고 4월 1일 비대위가 결성되면서 급기야 12만 동문을 대표하는 총동문회가 가세하고 나중에 총학생회가 합류하였다. 


현승종씨 반대를 위한 비대위에서 학생들은 주된 역할이 아니었다. 이는 현씨가 나중에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민형사상 소송을 냈을 때 각 단체대표 중 학생대표를 제외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팩트의 왜곡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단지 학생들이 반대를 했다고 하면 어린 행동이라거나 얄팍한 역사지식에 의한 객기쯤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씨를 반대한 주된 세력은 한 교수보다 더 오랫동안 역사를 공부한 문과대 교수도 법을 전공한 전국 사립대 법대학장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현직 법대학장도 포함되어 있다.  




핏대 정청래





그렇다면 정청래는 한홍구의 어떤 주장을 문제삼았는가? 그의 목소리를 직접 청취한다. 


위에서 한 교수는 학병에 나간 것을 학생들이 친일행위로 본 것이라 단정했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 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른 글도 아니고 역사의 문제를 다루는 학자가 어떻게 기초자료도 조사하지 않고 함부로 글을 쓰는지 놀랍다....학생들의 주장이 아님은 앞서 정정했고 비대위는 현씨가 학병을 나간 것을 친일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1945년 1월 20일 현승종씨가 학병을 나간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기념해 1·20동지회도 결성돼 있는데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저명인사가 많다. 일본군 장교 출신 모임인 이 모임에는 정말 깜짝 놀랄만한 추앙받는 인물도 떡하니 회원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친일로 때려잡을 만큼 민족건대 구성원들이 무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비인간적이지도 않다.(하긴 학생들이 반대했다고 한 교수가 굳게 믿고 있으니 가르치고 싶기도 했겠다.) 


비대위가 문제를 삼은 핵심사항은 현씨가 학병으로 나간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학병으로 나간 이후 자발적 의사(대단히 중요한 팩트다)에 의해 일본군 장교에 자원했고 일본 황국의 장교로서 황국신민의 첨병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현씨는 일본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팔로군과 교전까지 치룬 일본군 전투장교였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비대위는 현씨 개인의 과거에 대해 같이 아파했고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전력은 적어도 후학을 양성하는 기관의 대표로는 부적격이고 더군다나 설립자가 독립운동가인 민족사학에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음으로 이사장직을 수행할 권위를 상실했다고 판단해 사퇴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더불어 정청래 이 기고문은 퇴진 압박을 둘러싸고 현승종 전 이사장과 퇴진 압박측이 무엇을 쟁점으로 법정 투쟁을 벌였는지도 엿보게 한다. 


현승종씨는 결국 이사장직을 사임한 후 비대위 대표 5명을 명예훼손혐의로 검찰에 고소하였다. 사실 비대위와 현씨의 3년여의 법적공방의 핵심은 한 교수가 아는 것처럼 학병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인은 팔로군과 전투를 했지 독립군과 전투를 하지 않았다는 항변이었다. 그러나 우리 비대위는 각종 자료와 독립기념관 사료를 들이대며 팔로군에는 당시 독립군이 편제되어 있었고 따라서 현씨가 교전한 팔로군은 독립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과 다를 것이 없음으로 현씨는 독립군과 교전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간의 문제였다. 한 교수도 역사를 전공했으니 팔로군에 독립군이 배속되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가? 일본군 소위계급장을 달고 독립군이 배속되어있는 팔로군과 전투를 치른 사실이 도대체 친일이 아니라면 한 교수가 규정하는 친일의 범주는 과연 어디까지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논급들 통해 왜 정청래가 이 사건에 개입하게 되었는지도 우리는 얼추 정리가 가능해졌다. 


양측 주장에 대한 판단은 독자 몫으로 남긴다. 저를 둔 재판 결과는 이미 앞서 소개했다. 


**** 이 6회분으로 현승종 사태 이야기를 일단락한다. 경청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혹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질정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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