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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장태藏胎가 한반도 개발품이라는 전제가 태실 문화 성장을 봉쇄하고 지진구 신화를 낳았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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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백서 문서 중 장태를 정리한 태산서胎産書

 
조선시대 의궤 문화라는 것이 있다.

이를 선구로 연구한 한 분이 서울대 국사학과에 오래 봉직한 고 한영우 선생이라, 선생이 생전에 그 의궤 연구서라 해서 꽤 묵직한 단행본을 낸 적 있다. 

그 서문, 그리고 본문 곳곳을 보니 의궤 문화가 조선의 창안이라는 논급이 너무 많았다.

이런 기록 전통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고, 오직 조선에만 있었다는 말씀이었다. 

내가 그 대목들을 마주하고선 분개했다.

조선의 창안이라 해서 그것이 더욱 빛나는가?

나는 결코 그리 볼 수도 없었고 또 내가 실제로 중국 고대사를 공부하면서 의궤와 관련한 논급을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 의궤서를 가장 활발히 유통한 데가 실은 불교와 도교였다.

불교 도교는 종교라 의례 없이 성립할 수 없고, 그래서 이런 의례를 가장 활발히 기록으로 정리하는 전통이 있었으니, 이런 전통은 이미 아무리 늦어도 위진남북조시대에는 횡행했거니와

실제 대장경이나 도장道藏을 보면 당장 그 서목에서 의궤儀軌라는 말은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아가 시황제 시대인가 한 무제 시대인가 내가 사기 봉선서를 읽다가 태산에 올라 천자가 하늘을 제사하는 의식을 준비하는 장면들을 기술하면서 그것을 의궤로 정리했다는 대목을 본 일이 있었다.

이 봉선서 관련 기술은 당시 내가 훗날 언젠가는 써먹으리라 해서 차기箚記를 해 둔 것이 있었으니 

불행히도 나는 그 차기를 저 한영우 선생 의궤 책을 서평하는 데 가장 먼저, 그리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써먹고 말았다. 

지진구地鎭具니 진단구鎭壇具니 그 이름도 요상한 이 전통이 왜 문제인가?

더 구체로는 내가 보건대 한국고고학이 지진구 혹은 진단구라 해서 건물을 지으면서 땅의 동티를 막고자 항아리에다가 무엇을 넣어 지신을 달랠 요량으로 뚜껑을 덮어 봉안했다는 그 요망한 주장이 횡행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나는 장태藏胎 문화의 한국 독창설 혹은 한국 기원설에 있다고 본다. 

간단히 장태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으니 그 장태문화 위대한 유산이 되어야 할 항아리가 지진구 진단구로 둔갑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잘라서 어딘가에 넣어서 봉안하는 장태 문화는 적어도 동아시아 문화권을 보면 중국이나 일본은 쉬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런 흔적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한국에 견주어 있는둥 마는둥 존재감 제로다. 

중국의 경우 실로 요상하게도 선진시대 그리고 양한시대를 중심으로 장강 문화권에서 잠깐 유행하다가 이내 흐지부지해 버리고 훗날에도 물론 이 지역을 중심으로 그것이 성행하기는 했지만 북방 문화가 그것을 채택하지 않은 까닭에 있다 해도 그닥 주시하지 않은 문화전통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한반도 장태문화는 그 성행 양태를 보면 한국이 시조는 아니라 해도 사실상 종주국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정도로 극성한 양상을 보인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결국 터지고 말았으니, 나는 이 장태 문화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은 까닭에, 특히 그 유래 비롯하는 데를 제대로 짚지 않은 까닭에 작금과 같은 지진구 진단구 극성 현상이 나타났다고 본다.

왜?

지금 지진구 진단구라 한국고고학이 간주하는 상당한 단지들이 실은 장태문화 소산, 곧 태를 묻은 태항아리이기 때문이다. 

이 장태 문화가 한반도 고유한 것, 혹은 그 비스무리한 것으로 치부되고, 나아가 그 흥행 극성이 조선시대로 국한하는 바람에(고려시대도 실은 몇 개 사례가 보이지 않고, 삼국시대는 오직 김유신 진천 태실만 보일 뿐이다.) 그런 극성을 낳았을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광범위한 장태 전통을 그만 탈각 망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장태 문화는 실은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에서 극성을 구가했다.

고려시대에도 극성에 극성을 구가했다.

당장 태조 왕건만 해도 고려사 고려사절요에서는 그 장태가 탈락했지만,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반드시 개성을 기술하면서 그것이 어디 묻혔는지를 기록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가뜩이나 중국 쪽 장태 문화에 대한 탐구가 부족한 실정에서, 우리가 말하는 장태 문화는 실상 왕실 중심이라,

사대부가 민가에서 유통한 장태를 개무시하는 바람에, 그 흐름을 놓치고 말았으니,

한반도 장태문화는 중국 장강 유역에서 발원해 펼쳐진 그 장태 문화가 유구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이은 위대한 생명존중 전통의 갈래다. 

무덤이 생명 연장이라면, 장태는 생명의 출발이다.

그래서 둘은 대척에 선 듯하지만 그 상통하는 맥락은 실은 똑같고 그래서 장태랑 무덤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물론 삶과 죽음이라는 배경이 달라 그 모양이 조금 달랐을 뿐, 그 기본 맥락, 그러니까니 내가 매양 말하는 그랜드디자인은 똑같다. 

저 중국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선진 혹은 양한시대에 펼쳐진 장태 문화를 놓치니, 그에서 직접 감발해 곧이어 한반도에서 꽃을 피우게 되는 삼국시대 장태 문화를 우리는 상실하고 말았다. 

역사에 흔적이 그리 많지 않다 해서 우리는 그 경각심을 놓쳐 버린 것이다.

마왕퇴 백서 문서에 보이는 장태에 관한 그 허심한 기술이 실은 핵폭탄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 직후 한반도에 펼쳐지는 삼국시대 장태문화를 우리는 비로소 온전하게, 그리고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마왕퇴 문서를 봐라.

그래서 한반도 삼국시대 장태 문화가 풀리고, 그래야 지진구 진단구 헛소리가 사라진다. 

저 마왕퇴에서 기원하는 중국 쪽 장태 문화는 위진남북조시대에도 면면히 장강 유역 문화권에서 이어져 그 시대 불교랑 도교가 양립하는 가운데, 주로 도교 쪽에 붙어서 그 긴 생명력을 자랑하게 되거니와,

한반도 삼국시대 장태 문화는 마왕퇴에 직접 뿌리를 두기는 하지만, 그 직접 타격점은 기원전 2세기 전중반 마왕퇴일 수는 없고, 4~6세기 삼국시대 오나라 이래 동진에서 양나라에 이르는 남방 문화에서 기원한다. 

이 뿌리는 아는 문제가 이만큼 중요하다.

왜? 그것을 기점으로 장대하게 펼쳐지는 드라마를 비로소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까닭이며, 이를 통해 지진구 진단구 개소리도 끝장 내는 까닭이다. 
 
[독설고고학] 십년 전 단 한 놈도 동조하지 않은 지진구 진단구 개소리설
https://historylibrary.net/entry/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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