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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대나무를 돌림한 허균의 형제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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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허씨가 저리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대체로 예쁘거나 곱디고운 중년배우가 연기하는 일이 많다!

 
바로 앞에 신동훈 선생께서 돌림자 항렬자 문제를 지적했거니와, 이와 연동해 조선 중기 때 가문이 영욕을 거듭한 양천 허씨 허균許筠(1569~1618) 집안을 보자. 

그의 아버지는 허엽許曄(1517~1580). 선조 시절 그 유명한 동서 분당 때 율곡 이이 중심 서인에 맞서 동인東人의 당수급이었다. 

이 집안 특징이 외자를 선호했다는 사실인데, 이 문제는 훗날 혹 살필 기회를 보기로 하고 

조선시대는 철저한 일부일처제라, 동시기에 정식 마누라가 둘 이상일 수는 없다. 

그는 정실 마누라 둘을 두었으니, 조강지처 청주한씨한테 장남: 허성許筬(1548~1612)을 두고, 그 정실이 죽자 이번에는 강릉김씨를 재취로 맞아들여 차남 허봉許篈(1551~1588), 삼남 허균許筠을 두었거니와, 이들이 정실 아들 셋 명단이다. 

참고로 그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은 재취에서 얻은 정실 딸로, 허성한테는 배다른 누이동생이며, 허봉한테는 동부동모同父同母 누이동생이고, 허균한테는 동부동모 누나다. 

저 허성·허봉·허균은 분명 돌림자를 썼는데 외자인 까닭인지 부수자로써 항렬을 표식했다.

곧 筬·篈·筠이라 해서 대죽竹이라는 같은 부수자들을 썼다. 이는 조선후기 이래 일반화하는 오행 기반 돌림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허엽을 기준으로 보면 고조 허추, 증조 허창, 조부 허담許聃, 아버지 허한許澣(지금 당장 일부 선조의 경우 한자 표기를 못 구하겠다) 역시 모조리 외자이고, 그 후손 중에서도 미수 허목許穆(1596~1682)에서 보듯이 외자를 고수하는 전통이 아주 강하다. 저 집안 서출인 그 유명한 동의보감 편찬책임자 허준許浚(1539~1615)은 달리 말해 무엇하랴?

저 때는 시대도 그러하고, 특히 외자일 경우에는 오행 기반 돌림자를 쓸 수 없다. 저때는 형제항렬을 표식하고자 저와 같이 같은 부수자를 쓰는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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