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소장 황인호)가 부여군(군수 박정현)과 협조해 지난 6월부터 7월까지 ‘부여 관북리유적 18차 유구분포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 일대가 백제 사비기 핵심 지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성토층과 함께, 사찰 관련 유물들을 확인했함으로써 이 지역에 동 시대 백제 사찰이 존재할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28일 발표했다.
연구소 문의한 결과 두 지점은 같은 데가 아니라 조금 떨어져 위치한다.
곧 소조불 파편이 나온 지점은 부여읍 쌍북리 527-18인데 견주어 문제의 성토층이 확인된 곳은 쌍북리 516-12다.
아래 지도를 눈여겨 봐주기 바란다.

맨 위 북쪽 부소산을 중심으로 부여여고라고 표시된 그 남쪽 기슭이 바로 이번에 트렌치 조사가 이뤄진 곳이다.
부소산 앞쪽 부여 읍내 복판에 정림사지가 위치하며, 부여나성을 둘러가며, 그 동남쪽 바깥 지점에 사비시대 백제 왕릉이 포진하고 그 곁에 능산리 절터가 있으며, 그 반대편 서남쪽 부여나성 바로 안쪽에 저 유명한 군수리 절터가 위치한다.
정림사지 절이 사비도성 안쪽 부자들 삥을 뜯는 곳이라면, 그 앞쪽 양날개처럼 포진한 군수리 절이랑 능산리 절은 사비도성과 그 밖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 길목, 곧 고속도로 톨게이트 같은 곳이라, 그 길목을 지키며 삥을 뜯은 곳이다.
군수리 절은 금강을 오가는 배들한테서 삥을 뜯거나, 금강을 넘어 가는 뱃사공들한테서 삥을 뜯었다.

전통시대 절이 다 그렇다. 주요 길목마다 지키며 삥을 뜯고 숙박업을 하며 그걸로 연명했다. 그것이 절이 사는 길이었다.
그 점에서 이번에 또 다른 사비시대 백제 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저곳은 위치가 아주 절묘하다. 곧 부소산과 정림사지를 연결하는 길목을 차지한다.
사비도성 핵심 구역이 어디인지 아직 확실치 아니한 점이 많지만은, 정림사지와 더불어 이번에 절터로 추정하는 곳이 절이 맞다면 그 왕경 핵심 구역에 위치한다.

흔히 백제를 일컬어 불교왕국이라 하지만, 막상 그 사비 왕경 핵심구역에서 백제시대 절이라고 확인된 데는 정림사지와 부소산 위에 있는 부소산사지(이전 서복사지라 한 곳)만 확실할 뿐이고, 이전에 구아리 사지라 해서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지만 영 꽝이 난 데다.
진짜로 정림사지를 중심으로 그 주변이 왕경 핵심구역이 맞다면 저 구역에는 절이 무수하게 있어야 한다. 하지만 꼴랑 두어 군데 흔적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 지도가 소조불 파편이 나온 쌍북리 527-18과, 수평 성토층이 확인된 쌍북리 516-12 상대적 위치다.
따라서 이번에 성토층 혹은 소조불 파편 출토지점 일대가 절터가 확실하다면 왕경 핵심 구역 중에서는 정림사지와 부소산 사지寺址에 이은 확실한 세 번째 사비시대 절터가 된다.
이번 시굴 조사가 중요한 사항이 바로 이것이다.

암튼 저 연구소 발표를 계속 인용하면 이번 조사에서 부소산 끝자락과 인접한 3-1구역(30,523㎡) 북쪽에서 풍화한 암반층 위에다가 인위적으로 약 1m 높이로 흙을 켜켜이 쌓은 성토층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쌍북리 516-12번지다.
한데 그 흙 다짐층을 하는 방식이 당시 왕궁과 같이 중요 건물을 축조할 때 사용한 전형적인 백제의 수평성토 판축기법이 적용된 것으로 드러남으로써 이 일대에 중요 건축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로 포착되었다 한다.
간단히 말해 건물을 세울 적에 바닥을 다짐하는데, 그 방식이 보통 건물과는 격이 달랐다 이거다. 암것도 아니다.
시멘크 공구리쳐서 아주 잘 다졌으니, 그런 다짐층을 썼다면 그 위에 들어선 건물은 보통내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뜻이다.
그동안 부여에서 이와 같은 수평성토 기법이 적용된 다른 사례로는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이 대표적이라고 덧붙였다.

이 수평 성토水平盛土란 말은 볼짝없이 지표면을 다짐하되 그 흙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흙을 일정한 높이로 고르게 쌓아 올리는 방식을 말한다.
이것이 대단한양 치지만, 얼빠진 놈 아니고선 다 이런 식으로 한다.
나아가 이번 조사지역 남쪽과 부여여자고등학교 동쪽 지점(쌍북리 527-18번지)에서는 불탄 기와 조각들과 함께 부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조각인 ‘광배’, 그리고 불상의 몸이나 광배 등에 작게 표현된 부처인 ‘화불化佛’, 그리고 옷자락 모양으로 추정되는 소조상 조각이 다수 수습됐다.
이로 보아 이 일대에는 불교 사찰이 있었을 것이다고 짐작한다.
광배 조각에서는 그 화염문火焰文(불꽃무늬) 테두리를 금으로 만든 안료(금니金泥라 한다)를 사용해 그렸으며, 불상 또는 보살상 옷자락은 컬러풀한 안료로 채색한 대목이 확인됐다고 한다.
조사단은 삼국시대 소조상에서 금니는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하면서 이것이 당시 쌍북리 일대 소조상 제작 기술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연구소는 이번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내년 5월까지 쌍북리 전역(109,183㎡)에 대한 유구분포조사를 실시하고 유적 정비 방향을 수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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