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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일본과 가깝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부터 어떤 식으로든 일본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시작이 부산진 전투였던 것만 봐도 알 만하지 않은가.
임진왜란으로부터 200여 년 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아버지 친구인 참판 윤필병(1730-1810)에게 시를 한 수 지어 바친다.
윤필병은 동래부사를 지낸 인물이었던지라 동래부사로서의 모습을 형상화하는데...
붉은 줄 그어진 미농지에다 시를 베끼고 詩寫米農紅搨紙
에도의 녹자 술잔에다 술을 따라주누나 酒傳江戶綠瓷杯
- <다산시문집> 권3, 시, <종려 윤필병 참판에게 받들어 올리다[奉簡棕廬尹參判 弼秉]>
시를 적는 '미농지'가 뭔가 하면 (아마 써보신 분이 있지 싶은데) 먹지를 대고 뭔가를 베끼거나 문을 바르는 데 쓰는 꽤 두꺼운 종이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 기후현岐阜縣 미노美濃 지방 특산물이라 '미농지'라고 한다.
참고로 이건 지금도 다이소에서 판다.
그리고 술 따라 마시는 술잔은 에도의 '녹자배綠瓷杯'라고 했다.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던 그 '녹자'란 표현이 500여 년 뒤 다산에 의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 분채粉彩로 녹색을 입힌 백자 술잔이었던 모양인데...한양에서 천리 넘게 떨어진 동래에 온 부사 양반, 이국취향이라도 마음껏 즐기는 게 타향살이를 견디는 방편이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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