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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걱정할 거 없다고 큰소리 뻥뻥 쳤던 추사 선생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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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에 유배 생활하던 1840~1849년은 동북아시아에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크게 불어닥치던 시절이었다.

아편전쟁이 딱 1840년에 일어나고, 그 결과 청나라는 불평등조약을 맺고 항구를 여럿 열어 서양의 진출을 용인하게 된다.

조선도 그런 움직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전해듣고는 있었다.

그때 조선 최고의 중국통이라 할 추사의 반응은 이랬다.

제주에 오는 일본 표류민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는 제주목사 장인식(1802~?)에게 보낸 간찰 중 하나다.

...
표류한 왜인에 대한 번뇌는 족히 신경쓸 게 못되오.

다른 나라 배의 경찰詗察에 이르러서는 격탁擊柝의 경계로 보아 확실히 깨우쳐 단속할 바이지만, 천 리 밖의 일이라 어찌 족히 이 땅의 소요야 되오리까.

중국의 오문(澳門, 마카오) 천진天津 사이에는 이를테면 화기(花旗, 미국) 황기黃旗 백기白旗 단응(單鷹, 프로이센 또는 오스트리아) 쌍응(雙鷹, 러시아)의 등속이 있어 해마다 왕래하여 칠팔천 척이 되는데 동속東俗이 매양 오랑캐의 정세에 익숙하지 못하니 보는 일이 적음으로써 괴이하게 여김이 많음은 당연한 일이라 우스울 밖에요.

...

- <완당선생전집> 권4, 서독, 일곱번째(장張 병사兵使에게)

청나라에 외국 배 7~8,000척이 드나들고 있음을 알았음에도 추사는 천 리 밖 여기는 걱정할 게 없다고 말한다.

외려 그들을 익숙하게 여기지 못함을 "우습다"고까지 하는데, 그가 죽기 전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1854), 애로호 사건(1856)이 있었고

사후 10년 뒤 병인양요(1866)가 일어난 걸 감안하면 너무 낙관적이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추사와 조선의 한계였겠지만 말이다.

(사진: 김석익(1885-1956)이 그린 김정희 초상(국립제주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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