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그의 평상심은 도道였는가 9>
그런 시대 흐름[사진이 법첩을 대체하는 시대 변화]을 잘 타고 성공한 서화가가 있었으니 바로 해강 김규진이다.
차별받던 평안남도 출신이었음에도 고종과 엄귀비 신임을 받아 영친왕에게 서화를 가르치기도 한 해강은,
법첩을 근거로 하는 걸 넘어 그 스스로 법첩을 만들어냈다.
그는 <해강난보>, <해강죽보> 같이 난초 치는 법, 대나무 치는 법을 직접 그리고 목판 또는 석판으로 인쇄해 책으로 엮어 팔았다.
당시로서는 그 인기가 대단한 것이어서, 1916년 초판이 나온 뒤 1918년 새롭게 꾸민 재판이 발간될 정도였다.
'근대 서화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았던 김규진, 그도 이완용과 무관한 사이는 아니었다.
앞서 이완용이 <천자문>을 썼다는 얘기를 잠깐 했다.
1922년 9월 그의 <천자문>이 석판으로 인쇄 발간되는 바, 그 제첨題簽을 김규진이 썼다.
전서와 예서를 섞은 듯 묘한 필치인데, 이완용의 근엄하고 각 잡힌 해서와 썩 맞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일본식으로 꾸민 책 표지와는 제법 어울린다.
*** previous article ***
[서예가 이완용] (8) 사진이 부른 법첩의 혁명
반응형
'探古의 일필휘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예가 이완용] (11) 윤치호와 이완용 (25) | 2024.08.08 |
---|---|
[서예가 이완용] (10) 서화전 보러 간 일당一堂 (23) | 2024.08.06 |
[서예가 이완용] (8) 사진이 부른 법첩의 혁명 (26) | 2024.08.04 |
Made in Japan을 쓰시던 동래부사 (32) | 2024.08.03 |
걱정할 거 없다고 큰소리 뻥뻥 쳤던 추사 선생 (29) | 2024.08.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