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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콜로세움의 의문, 모의 해전은 볼 만했을까?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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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구조로는 관중석도 없고, 저기서 물을 채우고 해전을 한다? 지금 구조로는 불가능하다.

 
물론 지금 남은 모습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로마시대 원형극장을 대표하는 대표 유산 로마 콜로세움을 가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은 측면이 많기는 하지만 개중을 대표할 만한 것으로 나는 특히 두 가지를 꼽거니와 

첫째, 이곳에서 물을 채우고 모의 해전을 했다 하는데 이 구조에서 어찌 그것이 가능했느냐이며 

둘째, 이곳을 꽉 채울 적에 5만 명인가 8만 명을 최대 수용했다는데 관중석이 없다! 는 점이 그것이라 

물론 2천 년이 흐른 지금, 하다 못해 돔 형식으로 뚜껑을 덮었다고도 하고, 그 증거로 로마시대 동전에 보이는 콜로세움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돔은 고사하고 이 두 가지만으로도 영 이상하기는 하다. 
 

서기 80년 주조한 로마 동전에 보이는 콜로세움. 돔이 보여?

 
무엇보다 현재 드러난 콜로세움은 관중석이 없다.

관중석으로 오르내리는 길목만, 층계만 있고 관중석이 없다.

이는 동시대 다른 로마시대 원형극장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인데, 뭔가 대대적인 개보수 혹은 파괴가 진행되면서 관중석이 아예 없는 그런 구조물로 변하지 않았나 하는 상상을 해 본다. 

나아가 이곳에 5만? 8만? 개소리 같다.

현재 기준이기는 하나 만 명만 들어도 압사 사고 난다.

5만 8만은 아무리 봐도 과장 같고, 경기장 밖에서 군고구마 오뎅 사먹는 사람들까지 고려한 듯한 수치 같다. 

그렇다면 해전 문제는 어찌되는가? 

지금 드러난 바닥 양태를 보면 길쭉한 방향으로 좍좍 열을 이룬 비름빡, 현재 드러난 양태를 봐도 적어도 2미터 이상, 혹은 몇 미터에 다다를 그런 비름빡이 마치 우리네 줄고래처럼 나 있고,

그 위 일부를 관람을 위해 판대기를 깔아 놨으니 여기서 관람도 하고, 일부 공연도 한다고 들었다. 

이런 여기다가 어디를 어케 물을 채우고, 전선을 띄워서 모의 해전을 한다?  
 

 
이 그림이 1776년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 Giovanni Battista Piranesi 라는 화가가 그린 콜로세움 판화라,

이걸 보면 바닥이 편편하게 흙인지로 차 있음을 본다.

그 한가운데는 오벨리스크는 아니지만 암튼 그 비스무리한 기념물이 서 있음을 본다. 

중요한 것은 맨 앞 그림, 곧 지금의 콜로세움 바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저 판화에서 바닥을 파 내면 현재와 같은 모습이 나온다. 

현재 바닥 일부는 판자로 깔았는데 이곳에 물을 채우고 해전을 할 때도 비슷한 원리로 저리 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해 둔다. 

그렇다면 저 바닥 줄고래 같은 시설들은 뭔가? 

저기에 동물을 가뒀던 모양이고, 놀이에 필요한 각종 장비들이 오르락내리락 한 듯하다.

저 무대를 삼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검투사와 싸우는 동물이 관중석 아래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바닥에서 오르는 장면을 보는데 그 원리일 것이다. 
 

 
이런 식 콜로세움 모의 해전 양태를 상상도로 복원한 그림이 있는데 이 모습이 현재의 콜로세움과는 언뜻 매치가 되지 않는다 이 뜻이다. 
 
이것이 저들한테도 무척이나 고민인 모양이라 문제는 그럼에도 콜로세움에서 모의 해전을 했다는 기록이 엄연히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 모의 해전을 저 시대에는 나우마키아naumachia라 불렀다.

라틴어인데 고대 그리스어 ναυμαχία / naumachía를 그대로 빌려온 차용어로 그 의미는 "naval combat", 곧 해전이라 한다. 

저런 나우마키아가 원형극장에서 곧잘 상연된 모양이다.

개폼 낸다는 의미도 있고 스포츠라는 성격도 무시하지 못한다.

로마시대 권력은 언제나 대중정치로 먹고 살았다.

대중이 흥미를 잃는 권력은 존립 근거가 없다.

그만큼 대중성은 정치의 요체였다. 
 

 
콜로세움에서 해전이 벌어지는 원리를 이런 식으로 도해한 자료가 있다.

평소에는 사자 호랑이 잡아먹는 경기를 하다가 가끔 물을 채워서는 배를 띄워놓고 저런 식으로 해전을 했다 한다. 

했다 하니 믿을 수밖에 어찌하겠는가? 

저런 관중석을 상상도로 그려놨지만, 현장에서는 도대체 관중석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이 역시 미스터리다. 

콜로세움 직전 역시 네로는 나우마키아도 적절히 통치에 이용했다.

저 시대 역사가들인 수에토니우스(Nero, XII, 1)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로마사, LXI, 9, 5)에 따르면 서기 57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이 마지막 황제가 개관한 목조 원형 경기장에서 나우마키아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 장소로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를 언급한 것 말고는 그 구체 지점은 모른다.

네로는 서기 64년에 다시 나우마키아를 개최한다. 그에 앞서 사냥이 있었고, 그 후에는 검투사 시합과 성대한 연회가 이어졌다(Dio Cassius, LXII, 15, 1).

이 경기들이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곧이어 로마는 이른바 로마 대화제로 쑥대밭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같은 목조 원형 경기장에서 열린 모양이다.

서기 80년 콜로세움이 마침내 개장한다.

개장식에서 황제 티투스는 두 가지 나우마키아를 선보이는데, 각기 병사 수천을 동원해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 분지에서 그 행사장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원형 경기장에 건설했다(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LXVI, 25, 1–4).

수에토니우스(도미티아누스Domitian, IV, 6–7)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서기 85년 무렵 콜로세움 내부에 나우마키아를 건설했고, 서기 89년에는 티베르 강 너머로 파낸 새로운 분지에 또 다른 나우마키아를 건설했다.

공사 과정에서 나온 돌들은 막 화재를 입은 벨로드롬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를 수리하는 데 썼다.

아마도 이 무렵 콜로세움 아래쪽 더 이상한 줄고래식 방을 완성했다고 보인다.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은 가로 79.35m, 세로 47.20m로 아우구스티누스 분지보다는 규모가 작다.

따라서 콜로세움 나우마키아는 이전 경기장들에서 펼쳐진 규모만큼 웅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물 크기이거나 그에 상당히 가까운 여러 군함 모형 승무원들 간 대결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실제 기동이나 심지어 부력의 존재 여부는 의심스럽다.

무대와 경기장 모두에서 배를 재현하기 위해 무대 소품이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난파선을 재현하는 장치도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타키투스, 『연대기』, XIV, 6, 1; 디오 카시우스 61, 12, 2).

결국 제아무리 콜로세움이라 해도 모의 해전 나우마키아는 아무리 봐도 제대로 감흥을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냥 흉내 이벤트 아니었나 한다. 


 
이런 상상도들이 있는데 모조리 근현기 화가들이 상상으로 복원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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