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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경전의 표준화를 부른 후한 희평석경熹平石经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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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서 인용하는 일부 해설과 모든 도판은 아래에 바탕을 둔다. 

길어서 전문을 옮기지 못하니 혜량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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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제灵帝 희평熹平 4년(175년)에 처음 새운 희평석경熹平石经은 한석경汉石经이라고도 한다.

돌에 당시 통용하던 예서隶书 하나 글자체로 새겼기에 일자석경一字石经 또는 금자석경今字石经이라고도 한다.

이 석경은 《노시鲁诗》《상서尚书》《의례仪礼》《주역周易》《춘처春秋》《공양公羊》《논어论语》 7부 작품으로 구성되며, 총 48개 석판에 새겼다.

이 중 46개에는 저들 텍스트 본문이, 나머지 2개에는 후기后记를 적었다.
 
《후한서 영제기后汉书·灵帝纪》에 따르면, 희평석경熹平石经은 후한 영제灵帝 희평熹平 4년(서기 175) 봄 3월에 세웠다.

희평석경을 쓴 이에 대해 후한서 채옹전蔡邕传에서는 "채옹이 직접 비석에 글자를 새겼다"고 해서 그의 글씨인 것처럼 기술한다.

하지만 당장 수경주水经注에서는 "채옹을 비롯한 여러 사람 이름이 비석에 새겨 있다"고 해서 채용 혼자 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석隶释》에서는 이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한다. "역사에 따르면 채옹은 직접 글자를 쓰고 그걸 기술자한테 새기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고전들 필체는 모두 다르다. 채옹은 예서에 능하고 여러 서체에 정통했지만, 글자 수가 너무 많아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 따르면 채옹이 당계전堂溪典, 양사杨赐, 마일제马日磾, 장순张驯, 한설韩说, 단양单飏 등과 함께 고전을 교정했다. 현재 《공양公羊》(춘추공양전을 말한다)과 《논어》 뒤쪽에는 조역赵䧕, 유당계刘堂溪, 마일제의 이름만 남아 있다.

장문张文, 소릉苏陵, 부정傅桢, 좌립左立, 손표孙表와 같은 몇몇 다른 사람이 몰래 글자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 분명히 같은 시기에 글자를 쓴 사람이 더 있었을 것이다."

마형马衡은 또한 "이처럼 방대한 작업은 소수의 사람으로는 결코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채옹이 서예에 능했다 하지만, 혼자서 20만 글자 이상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마형은 더 나아가 채옹이 광화光和 원년(178년)에 재변災变에 대한 상소로 죄를 얻어 삭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강해江海 지역으로 도망쳐 오회吴会에 머물기를 12년간이나 했다.

따라서 채옹이 이 작업에 참여한 기간은 고작 3~4년에 불과했을 것이다.

『수경주』에 따르면, 희평석경은 광화 6년(183년)에 완성되었으며, 완성하는 데 9년이 걸렸다.

따라서 채용이 모든 글자를 혼자서 썼을 가능성은 없다.

더욱이 마형의 관찰에 따르면, 희평석경에 수록된 7개 경전은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필적은 제각각이다.

한 사람이 한 권의 고전을 썼을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한 권의 고전을 썼을 수도 있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요컨대, 저 석경 정리와 글자 새김 작업은 여러 사람이 함께 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오늘날 단편적인 《희평석경》 탁본을 보면 《춘추》, 《주역》, 《서서》의 서체가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수경주》와 《예석》의 기록과 마형의 해설이 타당함을 보여준다.

 
***
 
저 희평석경이 경전의 표준화를 불렀다면, 그 직전 허신의 설문해자는 글자의 표준을 불렀다.

설문해자가 나옴으로써 방언적 차이라고 할 만한 글자의 다양성이 급격히 소멸했다. 
 

▲《熹平石经·后记》残石拓片
释文:经本各一通付太常诸
字疵毁所不知书策解难固本
□传记论语即韶所校订以为可
列置讲堂以参当试一劳而久逸暂费□
张玹司空兼集曹掾周达属尹弘杂议
隐之士筋核圣术说难传义文指条畼以
恨也巡欲鑿石正书经字立于大学绝□
又隆暑炎赫非苍卒所成可页秋凉收
 

▲《熹平石经》残石

 

▲《熹平石经》残石

 

▲《熹平石经残石》拓片
释文:□□□□
顿子沈子□
正月暨齐平三
弟招杀陈世□
□越杀□
 
 

▲《熹平石经》残石

 

▲《熹平石经》残石

 

▲《熹平石经》残石

 

▲《六经堪所藏汉石经残字》拓片
释文:泄其
有苦叶
四章章
以渭浊
雠既诈我
胡不归微
 

▲《六经堪所藏汉石经残字》拓片
释文:其车三千
叔征伐猃
彼四牡四牡驿
无声允也
其麎孔
人于焉
 

▲《熹平石经 · 尚书》残石拓片
▲《熹平石经 · 春秋》残石拓片

 
 

▲《七经堪所藏汉石经残字》拓片
释文:之谋其一
出游以
何哉其二王
雨雪其霏
女其
 

▲《熹平石经》残石

 

▲《熹平石经残石》拓片
释文:□□
日至于旬
罪寇攘姦轨
不友于弟□
引恶

 

▲《熹平石经·后记》甲石背面拓片
▲《熹平石经〈易经〉残石》拓片(正面)

 

▲《熹平石经残石》拓片
释文:匪我衍期
葚于嗟
室劳矣
亦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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