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지시대 천일염 제조법 도입과 그에 따른 대규모 제염 산업 전개 이전, 전통하는 제염 방법은 바닷물을 끓이는 방식이었으니 아래 태조실록 3년 갑술(1394) 8월 22일(기축) 증언은 그것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왜구가 [전라도] 영광군靈光郡에 침입했으니 왜선이 10여 척이었다. 소금 만드는 인부 30여 인이 힘껏 싸워 세 사람을 목 베이니, 왜구들이 쫓겨갔다.
○己丑/倭寇靈光郡, 倭船十餘艘。 鹽夫三十餘人, 力戰斬三級, 寇敗走。
Japanese pirates invaded Yeonggwang-gun, arriving in about 10 ships. About 30 salt-making workers fought with all their might and beheaded three of the pirates, causing them to flee.
이에서 소금 만드는 사람들을 염부鹽夫라 했음을 본다.
나아가 왜구 침입 당시 소금 만드는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가 일시에 모였다고는 보기 힘들다.
저들이 떼를 지어 소금 만드는 일을 하다가(혹은 그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가) 마침 그곳으로 왜구가 들이닥치니 저들과 맞짱떠서 자율로 물리쳤다는 맥락으로 봐야 한다.
도대체 저 정체는 무엇일까?
왜 왜구는 소금 마을을 들이쳤을까?
소금 획득이 목표였을까?
나한테 더욱 중요한 것은 저 당시 적어도 남정네 기준으로 서른 명이나 되는 대규모 소금 만드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었다가 되겠고
더구나 그러한 그들이 완력을 휘둘러 왜구를 물리친 것은 물론, 개중 세 놈은 잡아서 모가지를 땄다는 데 있다.
도대체 저들은 정체가 뭘까?
딱 하나다.
당시 화폐 경제 시장 경제가 없었으니 저들을 저리 모여 돈 벌자고 저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뭐냐?
국영 혹은 공공기관이라 봐야지 않겠는가?
저리 운영할 기관은 국가 혹은 지방자치단체 밖에 없다!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성질이 고약한 팔뚝들이었다.
요컨대 저 염부 서른 명은 하나하나가 다 마동석이었다.
저런 저들이 중앙정부에 대항해 들고 일어나면?
얼마나 무섭겠는가?
***
이 아티클에 부산 외우 강두용 선생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았으니 소개한다.
부산 남구 광안대교 초입인 용호동을 동이[盆]가 모여있는 동네라 분개盆浦, 또는 분포盆浦로 불렀으며 조선시대 부산지역 최대 소금 생산지였습니다. 개화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기산 김준근 선생이 그린 이 작품도 아마 이 장소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
용호동 근처에는 나도 1년을 살았는데, 그랬던가? 그땐 왜 안 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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