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상 광개토왕이라 일컫는 고구려 제17대 왕은 이름이 담덕談德이라, 이 이름은 보나마나 노자 노덕경에서 가져왔으니, 이 시대가 마침 중국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라 노장 사상과 그에 기탁한 도교가 한창 흥성할 때라 그 시대 분위기에 고구려 역시 편승한 이름이다.
물론 이 당시 고구려 사회 역시 불교가 노도처럼 일어나는 시대였으니, 고구려를 포함한 당시 동아시아 사회는 아직 도불道佛이 사생결단하며 서로를 죽이기 시작하기 전이라, 내심 무시하기는 했지만, 두 사상은 나름대로 서로의 장점을 서로 보강하며 한창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더불어 담덕이라는 이름은 철저히 한화漢化한 이름이라, 간단히 순수 고구려말을 단순히 소리옮김한 이름이 아니다.
그가 언제 태어나 몇 살에 죽었는지는 삼국사기는 침묵하는 바람에 알 수 없었지만, 19세기 말에 발견된 광개토왕비를 통해 18세에 왕위에 올라 생전에는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일컬었으며, 21년간 왕위에 있다가 39세에 연가기국宴駕棄國, 간단히 말해 죽었다 했으니, 이로써 그의 생몰년은 374년(소수림왕 3)~412년(광개토대왕 21)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문제는 그의 재위 기간이 삼국사기보다 딱 1년씩 빨라졌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담덕은 392년 5월(물론 다 음력이다)에 즉위해 재위 22년(413) 겨울 10월에 훙薨했다 하지만, 비문은 저에서 딱 1년씩을 땡긴 시점으로 드러난다.
이건 분명 삼국사기가 그 앞 시대 고구려본기 어딘가에서 같은 해에 적혔어야 하는 두 사건을 착오로 두 해로 갈라 실으면서 한 해씩 밀려나는 되었다고 봐야하는데,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바로 잡혔다고 봐야 하는데, 현재 시점에서 우리는 두 해로 갈라진 지점과 다시 바로잡힌 지점을 알 수 없다.
비문에서는 그의 휘諱, 곧 본래 이름이 무엇인지 언급이 없다.
나아가 비문은 분명 편년체로 적기한 광개토왕본기라는 특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지만 그런 편년체 사서에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부모와 조부모에 대한 증언도 없다.
바위에 압축하는 문장을 쓰야 하는 비문이라는 특성을 고려한다 해도, 그의 생전 이름으로 오직 즉위하고 나서 신하들이 건성으로 지어바친 영락태왕이라는 존호尊號만 밝힐 뿐이요, 더구나 그 엄마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도 논급이 없다는 점은 주시해야 한다.
저 비문이 중요한 점 중 하나로 나는 언제나 고구려가 이미 저 시대에는 확실히 사관을 두어 역사를 편찬한 증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들거니와, 저 비문 중에서도 비록 군사적 업적, 주로 외부 정벌만을 골라 뽑기는 했지만, 재위 연대별로 왕이 무슨무슨 위업을 이룩했다는 일기는 말할 것도 없이 고구려가 이미 저 당시에 실록을 작성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저 업적들은 철저히 편년체를 고수했으니, 이 편년체가 중후반부에 가면서 느닷없이 무너진다.
이른바 수묘인 관련 기록이 등장하면서 기사본말체 비슷한 성격을 띠기 시작하는데, 이 문제는 저 문서 특징을 간취할 때 무척이나 조심해야 할 대목이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저 비문은 출처 유래 혹은 근원이 다른 두 개 별도 문서를 오려붙이기 한 판본이다.
전연 성격이 다른 두 개 문서를 붙이기 위해 본래하는 두 개 원본 문서는 깎아내야 했다.
이 깎아내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비약이 있으니, 어떤 점에서 그런지는 뒤에서 차츰 밝히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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