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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기사 같은 논문은 비극이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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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잠깐 얘기한 적 있지만 새삼 이 자리를 빌려 각인한다. 

전업적 학문 종사자들이 생명줄로 삼는 일이 논문이고, 기자한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흔히 보도라고 하는 기사다. 

논문과 기사는 언뜻 글을 주된 양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한 양상 혹은 운명인 듯하지만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양극이 있다. 

곧 논문이 길어봤자 생명이 5년 10년이라, 이 기간이 지나면 쓰레기통으로 간다. 물론 훗날 그 연구성과란 것도 선행연구 성과 검토니 해서 언급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뿐이라, 논문이 5년 10년을 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 된다. 

그냥 쓰레기통으로 가야 한다. 어떤 논문이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떤 연구를 격발하는 동인이 된다? 그 학문은 발전이 없다는 뜻이며, 그런 데서 무슨 새로움이 있겠는가? 

반면 기자가 주업으로 삼는 기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한다. 

나는 매양 조중동을 예로 들거니와, 그래 조중동 특정한 정치 신념에 따라 얼마나 많은 비판을 받는가? 

하지만 그런 그들도 틈만 나면 인용하는 글이 조중동 과거 기사라, 특히 식민지시대 이래 현대 직전까지 저들 신문이 수록한 정보는 절대적이라, 조선왕조실록도 그에 버금할 수 없다. 

또 하나 논문과 기사가 갈라지는 점이 그 작성자의 익명성 여부다.

모든 논문은 필자 이름으로 기억하지만 기사가 작성 기자 이름으로 기억되는 일은 거의 없다. 

모든 기사에 작성 기자를 밝히는 이른바 기사실명제만 해도 내 기억에 한국언론에 본격 도입된 지는 20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기자 이름도 없다. 익명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역사 사료로 소환하는 기사지만, 어느 누구도 그 작성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하긴 아예 없으니 무얼 기억한단 말인가? 

이 이야기를 내가 꺼낸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내가 이참에 확실히 짚고자 하는 바는 논문이다. 

그래 같은 논문이라 해도 인문학에 견주어 자연과학 쪽은 특히나 증발성이 강해서 그래 그쪽 논문 5년 지나고 10년 지나면 쓰레기통으로 간다. 

문제는 인문학 쪽 아니겠는가?

세상 어떤 나라 인문학이 100년 전 논문을 끄집어 내고는 그것을 인용하는 데가 있단 말인가?

이꼴이 한국 인문학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이쪽 역사학을 보면 틈만 나면 백년 전 이병도가 쓴 글을 끄집어내고 50년 전 이기백 논문을 끄집어 낸다. 이러고도 무슨 발전이 있단 말인가?

백년 전 이병도가 호명되고, 50년 전 이기백이 소환되는 일은 비극이다. 

그들은 관뚜껑에 닫아 버리고 더는 고개도 내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들이 완전히 죽는 데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학문을 출발한다. 

100년 전 진단학보 논문을 끄집어 내는 일, 부끄럽기 짝이 없다. 

논문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나면 그건 퇴보다.

세상을 바꾼 논문은 세상을 바꾸고선 이내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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