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고인돌11 멘가 고인돌 Dolmen of Menga, 5천500년 전 신석기시대 거석 무덤 이 멩가 고인돌 Dolmen of Menga은 스페인 안테케라Antequera에 위치한 거석 무덤으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잘 보존된 고인돌 중 하나다. 기원전 3700-3200년경 신석기시대 유산으로 그 역사는 50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구조물은 큰 석판slabs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긴 복도가 있는 방을 형성한다. 전체 봉분은 지름 50m가량이며 그 무덤방은 통로를 포함 대략 직사각형으로 길이 25m, 너비 5m, 높이 3.5m다. 덮개돌인 캡스톤capstone은 약 180톤으로 추정되며, 선사 시대 구조물에서 사용된 가장 큰 거석 중 하나다. 기능은 그것을 건설한 신석기 공동체의 집단 매장지로 가능성이 높다. 방 안에서 도자기와 도구 등 무덤 물품과 함께 사람 유해가 발견됐다. 이런 유.. 2024. 8. 10. 지중해 사르데냐 고인돌 이 고인돌 데 사 코베카다Dolmen de Sa Coveccada는 이탈리아 사르데냐 북동쪽에 위치한 선사시대, 구체적으로 기원전 2700-2500년경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거석 무덤이다. 사사리Sassari 지방 칼란기아누스Calangianus 마을 근처에 있다. 위치는 아래 지도 참조 Dolmen Sa Covaccada, Mores · 07013 Mores, Province of Sassari, 이탈리아★★★☆☆ · 역사적 명소www.google.com 이 구조물은 한 거대한 캡스톤capstone[덮개돌] 을 지지하는 크고 곧은 석판들stone slabs[세움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방 또는 무덤과 같은 울타리를 형성한다. 약 10톤 무게가 나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캡스톤은 고인돌의 주목할 만한 .. 2024. 8. 7. 광개토왕비보다 큰 불란서 브리타니 신석기 선돌 언뜻 광개토왕비 변종 아닌가 하겠지만, 그보다 열라 크다. 광개토왕비는 내 기억에 414년인가? 광개토왕이 죽고 나서 그를 왕릉에 정식 매장하면서 그 아들이 세웠거니와, 높이가 6.39미터라 하고, 그 토대까지 합치면 조금 더 늘어나겠지만 이 분은 높이 9미터가 넘는다. 비교 대상이 될 만한 근거가 들어가지 않아 크기가 잘 가늠하지 않는다? 어머어마하다. 그럼 연세를 비교해 볼까나? 저 대따시 휴망거스 메걸리식 마뉴먼트는 태어나신 시기가 기원전, 서기 기준도 아니요 예수님이 태어나신 2천 년 전에서도 다시 5000–4000년을 올라간 시점이라 한다. 그러니 7천년 전 혹은 6천년 전이라면 저기나 여기나 다 신석기시대. 금속기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절이다. 멘히르 드 샤 둘라Menhir de Champ-D.. 2024. 7. 31. 고인돌 보호장치 문제는 어찌 대처했을까? 강화 부근리 고인돌이다. 그냥 기념물인지 무덤인지는 모른다. 저 내부는 아무나 들락한다. 저게 무덤이라면? 도대체 저 상태로는 보호막이 전연 없다. 이 문제를 저걸 만든 사람들은 어찌 해결했을까? 그냥 새끼줄 쳐서 들어오지마! 했을까? 혹 흙을 덮어씌운 건 아닌가? 봉분이 다 날아가고 저것만 꼴랑 남았을 가능성은 없는가? 저 보호막 장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단 하나 분명한 점은 저와 같은 상태로는 전연 내부를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2024. 6. 6. 김해 구산동 고인돌의 비극, 덮어놓고 까디비는 문화재 보수의 예견한 참사 문화재 보수현장을 보며 내가 언제나 분통을 터뜨린 일이 기어이 김해에서 참사를 빚고 말았으니, 문제는 이런 일이 이번에는 언론에 알려져 보도가 되어 문제로 부각했지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문화재 보수현장 문제는 무엇인가? 멀쩡한 것도 일단 까디벼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다. 이거 대구 팔거산성이라는 데서 발견된 석축 우물이다. 이게 발굴조사 완료 뒤 지금 보수정비가 되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와 같은 무수한 현장이 보수처리한 뒤 모습은 안봐도 비디오라, 이놈들 저 멀쩡한 거 다 때려부수고 오와 열 딱딱 맞추어서 돌 공가서 그걸로 보수했다고 돈 받아간다. (追補...이 팔거산성 우물은 그곳 해당 지자체 담당자가 이르기를 보수정비는 안했으며 현재 복토 중이라 한다. 혹.. 2022. 8. 8. 만화로 본 그 시절 '동양화' 유행 박수동의 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1) 70-80년대에는 어지간한 집마다 '동양화' 한 폭 정도는 걸어두고 있었다. 경제사정이 펴져 예술을 즐기려는 이들, 곧 중산층이 늘어났기 때문이겠다. 그 시기 대중에게 예술의 상징이란 가부장 세대에게 익숙했던 '동양화'였다. 멋진 그림 하나 걸어놓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문화인'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너도나도 그림, 글씨를 걸려고 해서 표구사는 연일 활황이었다고 한다. 그저 유행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긍정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끝은 왜 이리 미약해졌는지. 2) 고스톱을 고상하게 '동양화 공부'라고 하지 않던가? 거기서 박수동 화백은 이 내용을 뽑아내었으리라. 하지만 지금 보면, 박 화백이 조영남의 '화투' 시리즈를 예언했다고 할 .. 2022. 4. 3. 이전 1 2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