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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동의 <고인돌>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1) 70-80년대에는 어지간한 집마다 '동양화' 한 폭 정도는 걸어두고 있었다.
경제사정이 펴져 예술을 즐기려는 이들, 곧 중산층이 늘어났기 때문이겠다. 그 시기 대중에게 예술의 상징이란 가부장 세대에게 익숙했던 '동양화'였다.
멋진 그림 하나 걸어놓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문화인'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너도나도 그림, 글씨를 걸려고 해서 표구사는 연일 활황이었다고 한다. 그저 유행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긍정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끝은 왜 이리 미약해졌는지.
2) 고스톱을 고상하게 '동양화 공부'라고 하지 않던가?
거기서 박수동 화백은 이 내용을 뽑아내었으리라. 하지만 지금 보면, 박 화백이 조영남의 '화투' 시리즈를 예언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3) 만화도 훌륭한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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