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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대안파동4

미군정기 국대안 파동에 대한 오해 현재까지 소위 "학계"에서 이야기되는 국대안파동에 대한 분석논문은 대부분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 많다. 이런 논문들을 몇 가지 부류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의 "구제학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경우. 구제학제에서 고보와 고등학교가 어떻게 다른지도 구별 못하는 논문도 많다. 둘째. 미군정기 국대안파동이 미국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오도하는 경우. 미군정기 학제 개편은 조선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된 것으로 세계사적 측면에서 봐야 할 부분이 있다. 세째. 미군정기 국대안파동이 학계와 대학을 무시하고 진행되었다고 하는 경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다만. 그 "학계"의 당시 교수라는 사람들이 불과 1년전에는 그 대학교수가 아니었다는 점을 잊지 말길. 우리나라에서 해방 국면에 조선인.. 2023. 4. 9.
보유: 기본적으로 큰 오류가 없던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교육 정책 오늘 글의 보유를 쓴다. 앞에서 국대안 파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본편에서도 썼지만, 필자의 이에 대한 입장은 분명하다. 국대안 파동으로 비록 얼룩졌지만, 국대안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당시 신생독립국으로서 가용한 재원을 박박 긁어모아 제대로 된 학사위를 줄 수 있는 국립종합대를 하나 만들자는데 그걸 반대하면 다른 대안은 있는가? 결정 과정에서의 미군정의 독단. 이런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며 정책 자체의 내용에 대한 부분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국대안 파동 당시 소위 우리나라 "국립대학" 교수 중에 해방 전부터 그 대학 교수였던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해방 이전에는 일본인들 때문에 밀려 있다가 해방 이후 비로소 교수가 된 분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인재풀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2023. 3. 21.
대한민국의 50-70년대 (6): 국대안 파동 (2) 국대안 파동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인터넷 서칭만 해도 다 나오기 때문에 많이 적지 않겠다. 여기서는 국대안 파동 진행과정에 대한 약간 언급과 함께 그 결과만 다루고자 한다. 1. 국대안파동은 미군정 당국의 목적도 그러했고 최종 결과물도 어디까지나 "미국식 교육제도에 입각한 종합대학" 건설이었다. 당시 경성제대와 국공립 전문학교는 전공별로 산재하였는데, 해방 이전에도 일본인 교수가 대부분이었고 한국인 교수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긴급 충원된 조선인 교수로 급조한 전문학교가 전공별로 산재해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미군정 당국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옳다. 특히 미군정의 최종 목표는 일제하 전형적인 식민지 교육 형태를 띤 조선 교육을 미국식 6-3-3-4제를 도입하고 최종학부인 대학.. 2023. 3. 21.
대한민국의 50-70년대 (5): 국대안 파동 (1) 국대안 파동이라는 것이 해방 직후에 있었는데 여기 관심 없는 분들은 잘 모를 것이다. 이 사건은 해방이후 남북분단, 좌우대립에 촉매제 역할을 한 사건인데, 대학교육 분야에 미친 영향도 매우 컸다. 요약하면 이렇다. 미군정은 1946년 7월, 종전의 한국 내 대학과 전문학교를 묶어 "국립서울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대학이라 해 봐야 해방 이전의 경성제대-해방이후 경성대 딱 하나였고, 나머지 국립 전문학교는 각 분야별로 있었는데 이를 모두 단과대학별로 해체모여 하여 "국립서울대"라는 단일 체제로 정리하겠다는 것이어었다. 이 국대안파동은 현재 사학계에서 내린 평가가 필자가 보는 한 별로 공정하지 않다. 일단 남북분단 책임을 미국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은연중 투영되어 있는 저작이 많고, 국대안 파동이 미군정..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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