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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전4

안서도 둔전을 현화사에 시주했다는 기사 고려사절요 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을 읽어가다 보면 그 11년, 1020년 8월에 왕이 안서도安西道 둔전 1,240결을 현화사玄化寺에 시주하니 양성兩省에서 두 세 차례나 논박했지만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八月. 以安西道屯田一千二百四十結施納于玄化寺. 兩省再三論駁, 不納.] 고 하거니와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난 이것이 무슨 뜻일가 몹시도 궁금하다. 혹 이에 관한 선행 연구가 있기는 할 법한데 찾아보지는 않았다. 안서도라면 고려사 지리地理3에 보이는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를 말할 것이어니와 그 수도는 해주海州라, 이는 지금도 도시 이름으로 남았거으니, 이에 의하면 이곳은 태조 왕건이 군郡 남쪽에 큰 바다가 있어 해주海州라는 이름을 내리고 성종 2년(983)에 12목牧을 설치할 때는 해주에도 그 하나가 설.. 2024. 2. 13.
둔전屯田 장착하고 북방으로 진격한 고려 고려사절요 권 제4> 정종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8년(1042) 4월 조에 이르기를 ○ 여름 4월. 동여진東女眞 대상大相 오어달吳於達이 밭을 갈 소를 달라 하니 동로둔전사東路屯田司에 소속된 소 10마리를 하사했다. 이 무심한 증언이야말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기찬 북방 개척 그 실상에 대한 일대 증언이다. 동여진이라 하고, 동로東路라 했으니, 지금의 함경도 일대 동해안 쪽임을 유추한다. 저쪽은 여진 땅이다. 그 여진 땅을 향해 고려는 끊임없이 진격 북상해 올라갔다. 비록 윤관에 의한 여진 정벌이 한때 성공했다가 이내 실패하고 말았지만, 간단없이 전진 북상해갔다. 지금에서 저 모습을 바라보는 자들은 왜 한꺼번에 연해주까지 치고 오르지 않았느냐 하는 헛소리들을 해대지만(실제 백년 전 우리 조상들, 민족주의 역.. 2024. 1. 14.
[독설고고학] 연천 호로고루, 성벽을 벗어나야 호로고루가 보인다 연천 호로고루성이다. 보다시피 임진강으로 삼각형으로 삐죽하니 돌출한 곶에다가 한 쪽만 막았다. 나머지는 현장 가 보면 분명하지만 천애절벽이다. 좀 더 확대한 모습이다. 저 호로고루는 지금의 LH박물관이 토지공사 시절 그 박물관에서 연차 조사를 벌인 결과 고구려가 쌓고 이용한 군사기지로 드러났다. 잠깐 사용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장기간 주둔하며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성벽 바깥 세상이다. 한국고고학은 성곽을 논할 때 단 한 번도 성벽 바깥을 생각한 적이 없다. 고작 배수로 운운한 게 전부였다. 성벽을 벗어난 저 바깥 세상. 저기는 뭐하는 곳이었을까? 이걸 고고학은 물어야 한다. 하도 갑갑하니 내가 대답한다. 농사 지었다!!! 둔전屯田이다. 아래 글에 대한 답변이다. *** previous ar.. 2024. 1. 4.
[독설고고학] 보루에서 왜 쇠스랑 보습이 나오는가? 서울시가 설립한 공립박물관이라는 이름에는 실로 어울리지 않게 유물 실물을 확보하지 못해 온통 짜가로만 채우는 복제 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 한 켠에 전시품이라 해서 내어놓은 짜가 쇠스랑과 보습이다. 뭐 실물이야 다른 데 가 있다 치고! 저 쇠스랑은 하남 이성산성 출토품이라 하고, 보습은 광진 아차산성 출토품이라 한다. 같은 짜가 코너. 쇠보습은 구의동보루 출토품을 복제했다 하고, 저 쇠가래도 같은 지역 출토품이라 하며 쇠집게는 홍련봉 2보루 출토품을 복제했댄다. 묻는다. 산성에서 왜 저런 유물들이 출토하는가? 한국고고학이 왜? 를 물은 적 있는가? 맨 유형학이니 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정작 가장 중요한 왜? 를 묻지 않았다. 왜? 이걸 파고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딜 팠더니 무슨 유물이 어디에서 나왔고,..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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