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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왕13

봉상왕(烽上王) 고구려 제14대 왕이며 생년을 알 수 없고, 재위기간은 292∼300년이다.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臿矢婁)라 한다. 서천왕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왕위를 이었다. 가뭄으로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는데서도 아랑곳없이 대규모 공사를 강행하다가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에게 쫓겨나 자살했다. 봉산원(烽山原)에 묻힌 까닭에 시호가 봉상이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 조 : 봉상왕(烽上王)은 이름이 상부(相夫)이며 서천왕의 태자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서천왕이 23년에 죽자 태자가 즉위했다. 원년(292) 봄 3월에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 형제[諸父]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어 백성들이 우러러 보게.. 2018. 3. 13.
창조리(倉助利) 고구려 봉상왕~미천왕 시대 국상이다. 남부 대사자 출신으로, 봉상왕에 의해 국상으로 발탁됐다. 모용씨 침입에 고구려가 시달리자 고노자를 발탁해 막았으며, 봉상왕 말년에는 잇단 재해에도 왕이 대규모 공사를 일으키자 간했자다 말을 듣지 않자, 다른 사람들과 모의해 왕을 몰아내 자살케 하고 을불, 곧 미천왕을 맞아들여 정국을 안정시켰다. 삼국사기 권 제49(열전 제9) 창조리 전 : 창조리(倉助利)는 고구려 사람이다. 봉상왕(烽上王) 때 국상(國相)이 되었는데 그때 모용외(慕容)는 변경의 걱정거리였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모용씨의 군사가 강하여 여러 차례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니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高奴子)는 어질고도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침략을 .. 2018. 3. 13.
을불리乙弗利 고구려 미천왕 이름인데, 한국사 문헌에는 을불(乙弗)이라 등장한다. 《資治通鑑》 卷88, 晉紀10, 孝愍帝 建興 元年(313) : 요동의 장통은 낙랑과 대방 두 군에 웅거하면서 고구려왕 을불리와 서로 공격했으니, 해를 거듭할수록 풀릴 기미가 없었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을 설득해 그 백성 100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니, 모용외가 그를 위해 낙랑군을 설치하고는 장통을 태수로 삼고 준은 참군사로 삼았다. (孝愍帝 建興 元年, 313)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為之置樂浪郡,以統為太守,遵參軍事。→을불(乙弗) →미천왕(美川王) 2018. 2. 25.
주씨(周氏) 미천왕비이자 고곡원왕 어머니. 모용황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생환한 바 있다.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12년(342)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와,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 등을 보내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武)를 보내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했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 왔.. 2018. 2. 19.
여노(如孥)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본기 : 20년(319) 겨울 12월에 진(晉)나라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이전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 나라와 단씨(段氏)ㆍ우문씨(宇文氏)를 달래 함께 모용외(慕容廆)를 치게 했다. 세 나라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가 문을 닫고 지키며 오직 우문씨에게만 소와 술[牛酒]을 보내 위로했다.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외가 음모한다 의심하고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나는 홀로 성을 빼앗겠다”고 했다. [모용]외가 그 아들 황(皝)과 장사(長史) 배의(裵)를 시켜 정예군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실독관이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 2018. 2. 19.
소우(蕭友)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본기 즉위년 : 이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려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 산과 들로 을불을 찾게 하니 비류하 가에 이르렀을 때 한 장부가 배 위에 있음을 발견했다. 용모 비록 초췌하나 몸가짐이 보통사람과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짐작하고 나아가 절하며 말했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니 국상이 여러 신하와 함께 왕을 폐할 것을 몰래 꾀하고 있습니다.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시며 사람들을 사랑하셨으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 해서 저희들을 보내 맞이하게 했습니다”. 을불이 믿지 못하고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찾아보십시오”라고 했다. 소우 등이 말했다. “지금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라.. 2018.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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