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서원훼철3 서원훼철을 다시 본다 이 점은 예전에 김단장께서도 쓰신 부분인데, 우리나라 서원훼철은 밑바닥 부터 다시 봐야 할 부분이 있다. 서원이 백성을 괴롭힌다. 따라서 없앤다. 이런 점에서 서원 훼철에 대한 한국사의 기술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전부일까? 일본의 경우, 메이지 시대에 왜 막부학문소, 번교, 사립학교, 데라코야를 다 없애지 않고 근대교육기관으로 뼈다귀까지 쪽쪽 뽑아 전환하려 했을까? 바로 돈 때문이다. 메이지 정부를 정의하면 청일전쟁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 쥘 때까지도 극도의 재정 결핍에 시달렸다고 보면 된다. 학교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었는데, 학교를 지으려면 부지, 교원, 그리고 학교 건물 등이 필요한데 뭐 하나 돈이 안드는 것이 없었다 할 것이다. 따라서 가장 쉬운 방법은 메이지시대 이전의 전근대.. 2023. 10. 3. 서원철폐는 혹시 경복궁 중건 때문이 아닌가? 필자도 전혀 확인한 부분은 아닌데, 서원철폐: 1865년 경복궁 중건: 1865-1868년 이 부분을 보면 사실 서원철폐가 경복궁 중건 때문이 아니었는지 강하게 의심한다. 요는 서원 철폐 후 대량으로 나왔을 그 땅, 토지 등 재물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만약 국고로 들어갔다면, 결국 경복궁 중건의 재원 때문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것이 만약에 맞다면, 나라의 학교를 헐어다 궁궐을 지은 셈이 되겠다. 이건 물론 필자도 실증적으로 확인 못한 부분이라, 단지 심증일 뿐이라는 것만 알려둔다. *** 이는 중요한 지적인데 서원 철폐가 단순히 서원 문에 빗장을 거는 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경복궁 중건은 막대한 재원, 특히 목재를 필요로 하는데 그 목재를 신부재.. 2023. 8. 11. 대원군 서원훼철령에서 살아남은 47곳 고종실록 8권, 고종 8년 3월 20일 경술 4번째기사 1871년 조선 개국(開國) 480년 전국의 서원 중에서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폐하다 예조(禮曹)에서, ‘한 사람에 대해 중첩하여 세운 서원(書院)을 헐어버리는 문제는 두 차례의 하교에 따라 신 조병창(趙秉昌)이 대원군(大院君) 앞에 나아가 품의(稟議)한 결과, 「성묘(聖廟)의 동쪽과 서쪽에 배향하는 제현(諸賢)과 충절(忠節)과 대의(大義)를 남달리 뛰어나게 지킨 사람으로서 실로 백세토록 높이 받들기에 합당한 47개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사를 그만두며 현판을 떼어내도록 하라.」는 뜻으로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이미 사액(賜額)하여 계속 남겨두어야 할 47개의 서원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입니다. 계하(啓下)한 뒤 각도(各道)에 행회(行.. 2019. 6. 16.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