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소손녕5 [제1차 고려거란전쟁] (9) 죽지 마라 기도하는 성종 성종이 어떤 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해주海州로 행차한 일이 있다. 이때도 서희가 호종했으니 그에서 성종이 서희가 머무르는 막사로 들어가서 한 잔 빨자 한 일이 있다. 하지만 서희는 한사코 임금을 막아선다. “신하의 막사는 임금이 머무를 곳이 못됩니다”라는 논리였다. 또 임금이 한 잔 따라 주려 하니 이것도 막는다. 법도에 맞지 않다는 뜻에서다. 이에 할 수 없이 성종은 막사 밖에 앉아 어주御酒를 내오게 하여 함께 마시는 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보아 서희는 확실히 꼰대다. 그냥 넘겨도 될 일도 그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또 그 무렵에 공빈령供賓令이라는 직책에 있던 정우현鄭又玄이 봉사를 올려 당시 정치에 관한 7가지 일을 논한 일이 있었는데, 임금이 기분 나쁜 내용이 꽤 들어있었던 듯하다... 2024. 3. 2. [1차 고려거란전쟁] (4) 버선발로 뛰어나가 서희를 맞은 성종 일단 한 번 붙어나 보고 강화를 하건 땅뙈기를 떼어주건 하자는 서희의 제안에 순식간에 조정 여론이 바뀌었으니, 민관어사民官御事를 지낸 이지백李知白 또한 서희에 합류해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린 까닭에 이몽전이 돌아갔으니 뭔가 고려 측 움직임을 보고 다음 타켓을 정하고자 한 소손녕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중랑장中郞將인 대도수大道秀와 낭장郞將인 유방庾方을 앞세운 고려군이 거란을 격퇴한 것이다. 중랑장 대도수는 대씨라는 성으로 보아 볼짝없이 발해에서 넘어온 사람이다. 이리 되자 외려 겁을 먹은 쪽은 소손녕이었다. 고려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공략한 안융진에서 패했으니,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때 마침 고려 쪽에서 반응.. 2024. 3. 1. [거란의 치맛바람] (12) 딸을 죽였다고 사위 소손녕을 죽여 순장한 장모 예지황후睿智皇后 소작蕭綽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에는 소항덕蕭恆德, 곧 蕭손녕遜寧이 열전이 그의 친형 소배압蕭排押 열전 바로 뒤에 붙었거니와, 이에 의하면 소항덕은 통화 원년(983) 제5대 황제 경종景宗 야율현耶律賢과 예지황후睿智皇后 소작蕭綽 사이에서 난 월국공주越國公主한테 장가들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어 주로 군사 분야에서 출세가도를 달린다. 물론 굴곡도 없지는 않아서 군사 발동을 잘못했다 해서 공신 칭호를 삭탈당하기도 한다. 통화統和 14년(996)에는 행군도부서行軍都部署가 되어 포로모타부蒲盧毛朵部를 치고 개선했다. 문제는 이때 생겼다. 그의 열전에는 이렇게 적었다. (소항덕이 전장에서) 돌아오자 (부인 월국) 공주가 병이 들었다. 태후가 궁인宮人 현석賢釋을 보내 병 간호를 하게 하였는데 소항덕이 그와 사통하니 공주.. 2024. 2. 15. 소배압-손녕 형제한테 나란히 시집간 경종의 딸들 크게 3차에 걸친 고려거란전쟁에서 거란군 수뇌를 형성하는 소씨蕭氏 형제, 곧 소배압蕭排押과 소손녕蕭遜寧(=소항덕蕭恆德)은 국구國舅 소부방少父房 후손들이라, 대대로 집안이 황비를 공급하며 위광을 누렸다. 물론 부침도 없지는 않아서 걸핏하면 한대 얻어맞고 죽임을 당하는가 하면 삭탈관직되어 서민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저 두 소씨 형제를 흔히 부마도위駙馬都尉, 약칭하여 부마駙馬라 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황제의 사위인 까닭이다. 본래 부마駙馬란 말 자체가 딸린 말이라는 뜻으로, 황제가 행차할 적에 지금 모는 말이 피곤에 지치거나 혹은 부상당했을 적과 같은 비상사태에 투입할 대타를 의미했으니 이것이 훗날 임금의 사위라는 뜻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요사遼史 소배압 열전에 이르기를 그가 위국공주衛國公主한테 .. 2024. 2. 14. 요사遼史 소배압蕭排押·소항덕蕭恆德(소손녕蕭遜寧) 형제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소배압蕭排押은 자가 한은韓隱이다. 국구國舅 소부방少父房의 후손이다. 지략이 많았고 말을 잘 탔다. 통화統和 초년(983)에 좌피실상온左皮室詳穩이 되어 조북阻卜 토벌에 공을 세웠다. 통화 4년(986)에 송나라 장수 조빈曹彬과 미신米信의 군사를 망도望都에서 깨뜨렸다. 무릇 군대와 관련한 일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매번 결정에 참여하였다. 조금 지나 영흥궁永興宮 몫의 규糾와 사리舍利와 예랄拽刺과 이피실二皮室 등의 군대를 총괄하여 추밀사樞密使 야율사진耶律斜軫과 함께 연산燕山 서쪽 지역 함락되었던 고을들을 수복했다. 이해 겨울에 송나라를 칠 때 선봉이 되어 만성滿城을 포위 공격하여 소속 군대가 먼저 성에 올라가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남경통군사南京統軍使로 바뀌었다. 위국공주.. 2024. 1. 6.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