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한 번 붙어나 보고 강화를 하건 땅뙈기를 떼어주건 하자는 서희의 제안에 순식간에 조정 여론이 바뀌었으니, 민관어사民官御事를 지낸 이지백李知白 또한 서희에 합류해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린 까닭에 이몽전이 돌아갔으니 뭔가 고려 측 움직임을 보고 다음 타켓을 정하고자 한 소손녕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중랑장中郞將인 대도수大道秀와 낭장郞將인 유방庾方을 앞세운 고려군이 거란을 격퇴한 것이다. 중랑장 대도수는 대씨라는 성으로 보아 볼짝없이 발해에서 넘어온 사람이다.
이리 되자 외려 겁을 먹은 쪽은 소손녕이었다. 고려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공략한 안융진에서 패했으니,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때 마침 고려 쪽에서 반응이 온 것이다. 합문사인閤門舍人 장영張瑩이었다.
하지만 소손녕은 급이 맞지 않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당연히 다시 대신大臣을 보내어 군영 앞에서 면대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나는 일부러 고려가 낮은 급수 사람을 보냈다고 본다. 시간끌기도 있을 테고, 일단 의중을 다시금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였던 까닭이다.
한데 막상 대신급으로 보내려 하니 다들 엉덩이를 뺐다. 목숨을 담보하기 어려우니 제 살 궁리만 한 것이다. 영웅은 이런 때 나타나기 마련이라 역시나 서희가 뿅 하고 나섰다.
“신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감히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떠나는 그를 성종은 강가 나루터까지 배웅 나와서 손을 잡고는 건승을 기원했다.
이 강나루가 대동강이라면 당시 서경 치소는 대동강 남안에 있었을 것이고, 청천강으로 본다면 서경 기준으로 너무 멀어 아마 전자가 아닌가 싶은데 자신은 없다.
국서國書를 들고간 서희는 강대강 전략으로 맞선다. 허리 굽히고 들어오라는 소손녕 요구를 면전에서 거절하면서 동대동 맞다이로 만나는데 그럴 수는 없다면서 우린 같은 급이니 서로 예의를 표시하는 형식으로 하자 요구해 관철한다.
깡다구 하나는 끝내 준 서희다. 일단 서희로서는 기선 제압에 성공한 것이다.
한 코 죽은 소손녕은 “너희 나라는 신라新羅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다. 함에도 너희가 침범하여 갉아먹고 있다. 또 우리와 더불어 영토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宋을 섬기고 있으니, 우리 대국大國이 이 때문에 토벌을 하러 온 것이다. 이제 영토를 나누어 바치고 조빙朝聘의 예를 취한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협박한다.
이런 말을 듣고는 서희는 비로소 거란의 속셈을 간파한다. 딴 말은 다 요식이고 결국 저들이 원하는 것이 송과의 관계를 끊고 우리 거란이랑 손잡자 딱 이것임을 파악한 것이다.
그 자리서 둘 사이에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는 요사와 고려사 모두 침묵한다.
하지만 그 협의가 송과의 국교 단절과 그에 따른 거란과의 외교관계 수립, 특히 후자의 경우 말할 것도 없이 거란을 사대하고 그 표시로 때마다 조공한다는 그것임은 얼마 뒤 폭로된다.
하지만 예서 서희는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래 그건 들어준다. 그러면 너희도 우리한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있어야 한다.
소손녕이 묻는다. 그기 머꼬? 서희는 이렇게 말한다.
“토지의 경계를 논하자고 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 영역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침식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영역 안쪽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도적질하여 기거하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변덕을 부리므로 길이 막혀 통하지 못함이 바다를 건너는 것 보다 더 심하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다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 옛 땅을 되돌려주어 성城과 보堡를 쌓고 길이 통하게 하여 준다면 감히 조빙의 예를 갖추지 않겠는가. 장군께서 내 이런 말을 가지고 가서 천자께 전달하면, 어찌 불쌍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자칫 빈손으로 돌아갈 우려도 있고, 무엇보다 안융진 하나 함락하지 못한 마당에 다급해진 소손녕 또한 일단 이 제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한 일은 그만큼 이 전쟁 향방을 결정하는 데 중요했다.
일단 전권특사끼리 합의는 되었고, 이제 이런 합의를 양쪽 조정에 전달해 오케이 사인을 받는 절차가 남았다.
성종은 이게 웬 떡이냐 당연히 오케이했고, 거란 또한 순순히 받아들였다. 거란으로서는 이제 동방의 골칫거리 고려를 외신으로 거느리게 되었으니 성과가 작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화의가 성립하니, 거란 진중에서 소손녕과 서희는 진탕 퍼마시고 주지육림에 빠져 노래방 기계 틀어놓고선 놀았다. 얼마나? 7일간이나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이런 그가 서경으로 금의환향하니 성종이 버선발로 다시 (대동?) 강변까지 환영을 나왔다.
이 장면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할 것이다.
그랬다. 이 모습 훗날, 대략 30년 뒤 현종이 귀주대첩에서 귀환하는 강감찬을 맞을 때 보인 그 모습 딱 그대로였다.
그랬다.
강감찬은 여러 모로 서희의 아바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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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고려거란전쟁] (3) 거란의 고려 공포증을 간파한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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