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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북벌3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흔히 윤관 북벌과 공민왕-세종의 북벌은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자잘한 전략을 빼고 크게 보면 결국 농민의 식민을 바탕으로 항구적인 점령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본다. 그런데-. 왜 윤관북벌은 실패하고 공민왕-세종이 북벌은 성공하였는가. 필자는 이 두 북벌의 사이기에 농업기술의 혁신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구체적으로는 무신정권과 원간섭기. 이 시기에 뭔가 농업기술 관련하여 혁신이 있었다고 본다는 뜻이다. 윤관 때는 실패한 북방 지역의 농사가 공민왕 이후에는 안정적으로 가능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으리라 본다는 뜻이다. 요는 농민이 현지에 착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국 승패를 갈랐으리라 보는데 이 사이기에 무슨 일인가 농업기술 측면에서 혁신적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2024. 7. 19.
고려의 사민徙民과 발해민의 투항 1. 고려전기는 조선전기 만큼이나 활발히 북진이 이루어지던 시기로 고려 태조의 건국 이후 약 100년간 압록강 하구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흥미로운것은 고려 전기에는 사민 기사가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누락되었을 수도 있지만, 완전히 없지는 않으니 대표적인 것이 아래 몇 가지다. 서경에 사민하라는 전교 (918년):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列評守之. 서경에 고관대작 집안을 이주시키라는 전교 (922년): 是歲, 徙大丞質榮·行波等父兄子弟, 及諸郡縣良家子弟, 以實西京. 幸西京, 新置官府員吏, 始築在城. 親定牙善城民居. 남쪽 백성을 북쪽으로 옮기라는 전교.. 2022. 12. 24.
진흥왕대 국경선 아래 김 단장 쓰신 글을 쓰고 덧붙이면, 신라가 진흥왕 때 동해안을 따라 멀리 북상했는데, 저때 신라는 가다가 멈춘 것이 아니라 종족적인 면에서건 지리적인 면에서건 거의 갈 때까지 간 상태였다고 봐도 옳지 않을까 한다. 실제로 신라의 저 동북쪽 경계선은 돌파가 지난하여 그 후 900년이 지난 세종대에야 겨우 돌파하여 두만강 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윤관의 북벌은 여러가지 이설이 있지만 그 북쪽 경계가 진흥왕의 북벌선 이북으로 못 올라갔으리라 본다. 윤관의 북벌 북상 최대를 두만강 넘어 선춘령으로 본 것은 희대의 천재 세종이 육진을 우리 땅으로 굳히기 위한 명분쌓기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실제로 윤관 북벌의 북상치는 지금 황초령, 마운령비정도였을 것이라 본다. 윤관도 이때 지리적 경계, 종족적 경.. 2022.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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