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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성리학4

가장 빛났던 16세기 조선 성리학 필자가 보건데 조선 성리학이 정점에 이른 시기는 16세기다. 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죽고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던 무렵으로 중국주자학과는 또 다른 조선성리학의 특색이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무렵-. 일본주자학은 이 시기 주자학의 직접적 후예라고 보아도 된다고 보며 이 시기를 정점으로 이후의 조선성리학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했던 이야기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았다고 본다.에도시대의 학문은 1700년이 넘어서면서 조선을 완전히 추월했는데 여기에 난학이 더해지면서 메이지유신 전야가 되면 비교 불가능한 수준까지 그 차이가 벌어졌다. 이 학문의 수준 차이가 20세기까지도 내내 유지되었으며21세기 현재 그 차이가 많이 좁혀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할 수 없다. 2024. 9. 8.
일본 유학의 스모킹 건 한국 유학자들이 공부한 책을 보면 중국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고문진보. 중국은 거의 보지 않은 책이지만 한국의 선비들은 손에 끼고 살았다. 이 책이 그다지 좋지 않은 수준이라는 지적도 당대나 요즘 공히 있지만, 그러나 저러나 한국 선비들은 많이 읽었다. 다음으로 통감절요 (소미통감). 자치통감을 왕창 줄여 놓은 이 통감의 축약 버전은 흔히 조선시대에 통감을 읽었다고 하면 이 책을 가리킬 정도로 많이들 봤지만 중국은 거의 보지 않은 것으로 안다. 다음으로 십팔사략. 중국은 이미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는데 한국에서는 많이들 봤다. 재미있는 건 에도시대 초기 일본이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파고 들어갈 때 고문진보, 통감절요, 십팔사략은 덩달아 많이 읽었다는 것이다. 물론 에도시대 후기가 되면 이 책들.. 2024. 7. 26.
유시마세이토 湯島聖堂 동경 간다역 근방에 유시마 세이토라는 곳이 있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거의 찾는 이가 없는데, 성리학을 체제교학으로 삼은 에도시대 사실상 관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으로 우리로 치자면 성균관과 문묘쯤에 해당한다. 조선의 강항과 교류한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 때 도쿠가와 막부 관학의 중심지로 조영되기 시작, 메이지 유신 때까지 사실상 유학자의 본거지 노릇을 했으며, 유신 후에 동경대가 설립할 때도 이 유시마세이토의 에도시대 교육기관 일부가 참여한 바 있다. https://maps.app.goo.gl/cVMVMTWWUpaQgTbi6 유시마 공자 사당 · 1 Chome-4-25 Yushima, Bunkyo City, Tokyo 113-0034 일본★★★★☆ · 역사적 명소ww.. 2024. 6. 13.
일본 성리학 도입시기에 대한 논의 일본사를 보다 보면 일본에 성리학 도입시기에 대해 남북조시대를 지목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고다이고천황과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사상이 성리학의 정통론에 입각하고 있는 바, 남북조시대의 남조정통론이 성리학의 영향 하에 성공했다는 시각이다. 이를 이유로 일본의 성리학 도입시기는 남북조시대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에 대해서 한마디로 평하자면,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성리학이 뭔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정통론은 성리학의 아주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주장이며 남북조시대의 근왕론과 같은것은 굳이 성리학에 그 연원을 댈 필요도 없다. 성리학 성립 이전에 이미 근왕론은 유교에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에도막부가 성립될때까지 성리학이 무엇인지 그 실체에 대해 전혀 종잡지 못하고 있었다고 이.. 2022.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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