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항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피랍되어
일본에 머물면서 후지와라 세이카라는 일본 성리학의 개조를 만나
성리학을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강항이 성리학을 전해주었다는 것은 우리 쪽 일방적 주장은 아니고,
일본 교과서에도 그렇게 되어 있으니 어느 정도 양국에서 동의하고 있는 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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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시기 강항이 전한 성리학이라는 것은
소위 말하는 백제시대에 왕인이 천자문을 전했다던가,
백제가 불교를 전했다던가
이런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강항 선생이 일본에서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났을 때는
일본에서는 주자학을 모르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시기가 되면 사서의 주가 모두 주자주로 바뀌어 있고
한당고주漢唐古注는 협주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후지와라 세이카 역시 강항 선생을 만났을 때 승려 신분이었다고 하지만
사서에 능통한 상태라 주자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일본사에서는 주자학이 전래된 시기를 가마쿠라 시대라고 하므로,
주자학이 전래되었지만 그 내용을 정확히 이해 못하고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강항 선생이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났을 때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주자학의 전래와 이해에 있어서의 시간차는 일본만 그런 것이 아니며
우리도 그렇다.
우리의 경우도 고려시대-북송시기에 이미
송학의 정수가 한국에 전해진 것 같은 징후가 있는데 (아래를 참고)
한국의 경우도 인성론을 포함한 성리학의 전부를 이해하게 된 것은
잘 알다시피 16세기나 되어서의 일이었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성리학을 접해도
완전히 이해 못하는 단계가 꽤 오래 지속되었다 해도 별로 신기한 일은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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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강항 선생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의문을 질정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 보며,
이 때문에 강항
선생이 일본에 피로되어 체류한 불과 3년 사이에
후지와라 세이카는 불교 승려에서 일본 최초의 주자학자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주자학의 주자주라는 것이 그렇다.
그냥 읽어 내려가면 알듯 모를듯 한 상태가 된다.
이것을 질문응답에 의해 막힌 부분을 뚫어주면
그 순간 주자의 주장은 공리공론이 아니라
전체가 정밀하게 설계된 구조화한 철학체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강항 선생은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바로 그런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불과 몇년 사이에 후지와라 세이카는 성리학자로 입신하고
강항 선생을 환국시키는데 그가 적극적으로 돕고
그가 귀국한 후에도 일본 성리학은 계속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결국 18세기로 넘어가면 벌써 조선 성리학을 아득히 추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의 관계는
사제관계라고는 할 수 없으며
학문에 도움을 준 교류의 관계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자면 도반의 관계로
먼저 깨달은자와 늦게 깨달은자의 관계-.
그것이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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