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探古의 일필휘지

한국과 악연으로 얽힌 일본 관료,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

by taeshik.kim 2021. 7. 21.
반응형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을 본 이들이라면 1923년 관동대진재 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조선인 학살을 주장했던 콧수염 아재(김인우 분)를 기억할 것이다. 그가 바로 당시의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 錬太郎, 1868-1949)다.

그는 아키타 현 태생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 관료였다. 농상무성, 내무성의 여러 관직을 거치고 귀족원 의원, 내무대신까지 올랐다가 1918년의 '쌀폭동'으로 물러나 있었는데, 1919년 재기의 발판을 얻는다.

 

미즈노 렌타로 



3.1운동으로 일제는 조선의 통치방침을 '문화통치'로 바꾸게 된다. 그때 일본 수상이었던 하라 다카시(原 敬, 1856-1921)가 미즈노에게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자리를 권유한다. 정무총감이라면 조선총독부의 2인자 자리로 조선의 입법, 사법, 행정을 총괄하는 직책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차관급이었다.

장관을 지낸 그로서는 좌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밖에는 적임자가 없었던지, 하라 수상의 삼고초려 끝에 그는 정무총감 자리를 승낙하였다.

노부모의 허락, 조직과 인사에 간여하지 말 것, 예산을 마음대로 줄 것이라는 조건을 걸어서. 그렇게 그는 1919년 9월 2일, 조선 경성역에 도착했다.

바로 그 날, 미즈노는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의 폭탄 투척을 경험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 1858-1936) 총독을 겨냥한 이 의거는 수행원과 호위 경찰, 기자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데 그쳤지만, 3.1운동의 여운이 남아있던 당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놀랍게도,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미즈노는 그날 당일부터 야근모드로 들어가 비상근무를 섰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1920년대 일제의 조선 통치를 2년 10개월간 전면에서 지휘했다.

그는 어떤 일을 할 때 꼼꼼히 살폈고 꽤나 열정적이었다. 한 예로 조선에 있으면서 한학자를 초빙해 주3회 조선어 과외를 받았고, 다섯 달 만에 조선어로 연설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채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딴에는 기왕에 온 조선, 제대로 다스려보이겠다는 노력이었으리라.

 

미즈노 렌타로(1932) 



하지만 그를 당시의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1920년 4월 20일 <동아일보>의 다음 기사가 잘 보여준다.

정무총감 수야련태랑 씨는 조선에 드러온 후에 조선사람 선생을 청하야 조선말을 공부하얏는데 요사이는 공부가 어지간히 느러서 "진지잡으솟스무니까"를 다 게되얏디나 / 그것은 제법이지만은 "요보"라는 개소리는 행혀나 배호지 마랏스면 엇더할는지 그것도 진정 배우고십흐면 억지로 말나는것은아니지만은 ...

사이토 총독 바로 아래에서 충실히 조선통치 업무에 전념하던(필요한 예산을 따내기 위해 일본 내각에 가서, 안 들어주면 사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미즈노는 1922년 다시 내무대신으로 영전해 조선을 떠났고, 다음해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조선인 학살을 지시했다. 여러 모로 한국과는 악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인물인 셈이다.

일본제국 시대 내내 승승장구하였던 고관이자 정치가였고, 일본의 패전 후에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던 미즈노 렌타로.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가 또 다른 의미로 유명하다.

1899년 일본 최초로 <저작권법著作權法>을 발의했던 인물이 바로 당시 내무부 관료였던 미즈노 렌타로였다. '저작권'이라는 한자 단어를 처음 쓴 것도 그라는 설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22년 처음 거행된 조선미술전람회(이른바 鮮展)도, 미즈노의 회고에 따르면 정치에 열을 올리는 조선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볼거리를 만들어주고자 한 그의 작품이었다.




어쨌건 그런 사람이었던 미즈노 렌타로, 그의 글씨를 얼마 전 처음 보게 되었다(보여주고 사진도 허락해주신 소장자께 감사를). 당연하지만 표구도 일본식이고 글씨도 일본풍이다. 아주 잘 썼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필력이 상당하고 획에 망설임이 덜하다. 그의 성격이 그랬던 모양이다.

비백飛白이 많은데 이 무렵 일본 글씨 중에 뻣뻣한 붓을 써서 획에 끌린 기가 있는 것이 적지 않다. 끝에는 향당학인새香堂學人鈢라고 낙관을 했는데, 그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참 역설적인 호 아닌가.

글의 내용은 양웅(揚雄, BC 53 ~ AD 18)이 지은 <법언法言>의 한 대목이다.

몸을 닦아 활을 삼고, 생각을 바로잡아 화살을 삼으며, 뜻을 세워 과녁을 삼아 겨냥한 뒤 쏜다면, 쏘는 족족 반드시 명중하리라.
修身以爲弓 矯思以爲矢 立義以爲的 奠而後發 發必中矣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