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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山雜談27

안중근 본인은 빠진 그의 가족사진 안중근 의사 사형 집행 5분 전…마지막까지 품었을 사진 이주상 기자입력 2023. 2. 28. 21:21수정 2023. 2. 28. 21:51 https://v.daum.net/v/20230228212106521 안중근 의사 사형 집행 5분 전…마지막까지 품었을 사진 113년 전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까지 가슴에 품었던 가족 사진이 복원을 거쳐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재판 과정을 기록한 화첩과 안 의사가 남긴 글씨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주상 기자 v.daum.net 기사 제목이 감성적으로 나왔습니다만 사실 관계를 따지자면... 안중근 의사는 안 의사 본인이 빠진 가족 사진을 심문 과정에서 세 번 정도 본 것으로 드러납니다. 첫 번째는 가족 사진을 내밀자 자신은 가족이 없다며 난 가족이 없다며 부인했을.. 2023. 3. 1.
안중근 의사 유족을 모시고 함께한 시사회 by 이주화 (안중근의사기념관 학예연구사) 안중근 집안(조부 안인수를 정점으로 하는 팔촌친 공동체)에서는 현재까지 독립유공자 16분을 배출했다. 어느 집안도 이를 따라갈 수 없는데 이렇게 한 집안에서 대거 독립운동을 하면 그 가문의 경제적 기반이 송두리째 날아가기 마련이다. 한양 제일 갑부라던 이회영 육형제는 전 재산을 털어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는데 그 형제 중 이석영 선생은 말년에 상해에서 두부 찌꺼기로 연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황해도 해주에서 부유하기로 이름난 안중근 집안도 예외는 아니어서 원래 풍족하던 가산을 안중근 생전에 국채보상운동 참여와 삼흥학교 설립에 크게 소모하고(석탄회사와 채표회사 경영도 실패) 나머지 가산은 안중근 사후 온 식솔이 국외로 망명하면서 사라져버렸다. 근거지를 잃은 .. 2022. 12. 23.
안중근의 아들로 산다는 것, 안준생의 경우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1907~1952)은 흔히 호부견자虎父犬子의 대명사로 불리며 한국근대사의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있다. 영웅의 아들로 태어났으되 그 시대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지 못한 탓이다. 일제를 피해 상해에서 지내던 그의 삶은 하얼빈의거 30주년(이토 사망 30주기)이던 1939년 '만선시찰단'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면서 뒤틀린다. 이른바 "박문사 화해극"에 동원되어 이토의 아들과 만나 일련의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안중근의 아들과 이토의 아들이 나란히 찍힌 사진은 언론에 일제히 대서특필 되었고 이 사건은 식민통치 당국에게는 우월감을, 독립운동 계열에게는 좌절을 가져왔다. 이후 상해로 돌아간 안준생은 양측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멸시에 시달려야 했다. 해방 이후에도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국공내전..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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