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아들 안준생(1907~1952)은 흔히 호부견자虎父犬子의 대명사로 불리며 한국근대사의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있다. 영웅의 아들로 태어났으되 그 시대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지 못한 탓이다.
일제를 피해 상해에서 지내던 그의 삶은 하얼빈의거 30주년(이토 사망 30주기)이던 1939년 '만선시찰단'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면서 뒤틀린다.
이른바 "박문사 화해극"에 동원되어 이토의 아들과 만나 일련의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안중근의 아들과 이토의 아들이 나란히 찍힌 사진은 언론에 일제히 대서특필 되었고 이 사건은 식민통치 당국에게는 우월감을, 독립운동 계열에게는 좌절을 가져왔다.
이후 상해로 돌아간 안준생은 양측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멸시에 시달려야 했다. 해방 이후에도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국공내전에서 패전 중인 국민당을 따라 홍콩까지 피난하였다가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수일 전에야 서울로 귀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해 짐도 풀지 못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했으니 그야말로 운이 없었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당시 육군 법무감(대령)이었던 6촌 동생 안춘생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계속된 생활고로 부산에서 결핵에 걸렸고 상해 인성학교 동창이었던 손원일 제독의 주선으로 덴마크 병원선 'MS유틀란디아'호에 입원하여 요양을 하다가 1952년 향년 45세로 선상에서 세상을 떠난다.
한편에서는 일제에 굴종한 변절자요, 나아가 민족의 의지를 꺾은 친일파라 비난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영달을 누린 바도 없다. 그저 아버지의 이름을 받들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패망이 임박한 국민당을 따라다니다가 기껏 귀국했건만 일주일도 되지 않아 전쟁이 나서 다시 피난길에 오른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정세에 어두운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
범의 자식이 범이었으면 좋겠지만 인간사가 반드시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성군의 아들이 암군인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코로나로 한동안 발걸음을 하지 못한 안준생 묘에 일랑 선생님을 모시고 다녀왔다. 차제에 1975년에 동빈이 짓고 일중이 쓴 안준생 묘비문을 옮겨 적어본다.
順興安公俊生之墓
安俊生 先生은 順興을 本貫으로 文成公 裕의 二十七代孫이요, 曾祖는 鎭海縣監 仁壽며, 祖父는 成均進士 泰勳이요, 父親은 나라에 殉한 義士 重根이다. 安氏一門은 黃海道 海州에서 累代 살아오다가 父親 二歲 때에 縣監公이 아들 六兄弟를 거느리고 信川郡 斗羅面 淸溪洞으로 移居하였다.
一九O五年에 進士公이 別世한 뒤에 父親은 淸溪洞을 떠나 鎭南浦로 移住하였다. 一九O七年 봄 先生의 胎中 六個月 때에 父親은 二十九歲의 靑年으로 뜻한 바 있어 露領 海蔘威로 亡命의 길을 떠난 後, 그 해 陰八月 十三日에 先生은 鎭南浦 龍井洞에서 出生하였다.
一九O九年 十月 二十六日에 父親은 正義大道에 立脚하여 哈爾濱 驛頭에서 侵掠의 元兇 日本의 伊藤博文을 各國代表들과 萬人이 둘러싼 가운데서 連擊射殺하여 當時 世界人士들로부터 코리아가 아직 살아있었다는 讚辭를 받았고 千秋에 빛나는 民族正氣의 一大表象이 되었다.
이는 先生 三歲 때의 일로 同年 十月에 祖母 趙마리아 女史와 母親 金亞麗 女史를 따라 不得已 故國을 떠나 露領 蘇旺領에서 十年 동안 寂寞한 歲月을 보내었다. 十二歲 되는 해에 中國 上海로 移住하여 佛蘭西 祖界에서 살게 되었다.
先生은 一九三八年에 上海에서 之江大學校를 卒業하고 同年에 鄭公 寅台의 長女 玉女 女史와 結婚하였다. 祖母와 母親은 上海에서 別世하여 佛蘭西 祖界公園 一等墓地에 各各 安葬되었다.
그 後 先生의 一家는 一九四九年에 香港으로 避難하였다가 一九五O年 六月에 還國하였든 바, 六二五 動亂으로 一九五一年 一月에 釜山으로 避難中 先生은 病을 얻어 丁抹(덴마크: 옮긴이 주) 病院船에 入院 治療타가 一九五二年 十一月 十八日 下午 四時에 四十五歲를 一期로 病院船에서 別世하니, 釜山市 草梁四洞 뒷山에 安葬하였다가 一九七一年 五月 十二日 여기 抱川郡 惠化洞 天主敎 墓地에 移安하였다.
金庠基 撰 金忠顯 書
夫人 鄭玉女
子 雄浩 醫學博士 孫 度勇
子婦 淸達磨
長女 善浩 壻 韓成權
次女 蓮浩
一九七五年 五月 日 立
#안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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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안중근기념관 이주화 선생 글이다. 생각할 대목이 많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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