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0131 김흠운(金歆運) 생존연대와 이름 표기, 그리고 관위 등을 고려할 때 김흠운(金欽運)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영휘(永徽) 6년(무열왕 2: 655) 태종대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이를 치고자 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郎幢) 대감으로 삼았다. 이에 그는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 2018. 3. 7. 김달복(達福)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열전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2018. 3. 7. 달복(達福) ☞김달복(金達福) 2018. 3. 7. 신목(神睦)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기(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記. 706년. 신라 성덕왕 5년, 당 중종 신룡 2년) : 신문대왕(神文大王)이 오계(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하고 공(功)을 이루고는 천수(天授)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갔다. 신목태후(神睦太后)와 효조대왕(孝照大王)이 받들어 종묘(宗廟)의 신성한 영령(英靈)을 위해 선원가람(禪院伽藍)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성력(聖曆) 3년(700) 경자년 6월 1일에 신목태후(神睦太后)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 높이 극락에 오르고 대족(大足) 2년(702) 임인년 7월 27일에는 효조대왕(孝照大王)도 승하하였다. 신룡(神龍) 2년(706) 경오년 5월 30일에 지금의 대왕이 부처 사리 4과와 6치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구와 .. 2018. 3. 7. 효종(孝宗) ☞김효종(金孝宗) 2018. 3. 7. 김효종(金孝宗) 삼국사기 권제12(신라본기 제12) 효공왕 : 6년(902) 봄 3월에 서리가 내렸다. 대아찬 효종(孝宗)을 시중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효녀 지은 : 효녀 지은(知恩)은 한기부(韓部) 백성 연권(連權)의 딸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며[定省] 곁을 떠나지 않았다. 봉양할 것이 없으면 때로는 품팔이도 하고 또는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다가 봉양하였다. 그러한 날이 오래 되어 고달픔을 이기지 못하여 부자집에 가서 몸을 팔아 종이 되기로 하고 쌀 10여 섬을 마련하였다. 온 종일 그 주인 집에 가서 일을 하여주고 저녁에는 밥을 지어 가지고 와서 봉양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 2018. 3. 7. 이전 1 ··· 3215 3216 3217 3218 3219 3220 3221 ··· 3356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