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劉裕(363~422)는 동진東晉의 전쟁 영웅이다. 특히 권신 환현桓玄(369~404)이 동진 황실을 무너뜨리고 403년에는 스스로 황제라 일컫고 국호를 초楚라 하자, 그 이듬해 유의劉毅와 더불어 경구京口에서 거병하여 토벌한 공로로 신하로는 더 오를 데가 없는 구석九錫을 받았다.
한번 무너진 왕조는 재건하기는 했지만, 이미 권위는 실추할 대로 실추했으며, 권력은 점점 유유한테로 기울어졌지만, 어찌된 셈인지, 유유는 본색을 숨기며 17년이나 지내다가 58살이나 된 공제恭帝 사마덕문司馬德文 원희元熙 2년(420)에 접어들어 이해 정월에야 집권야욕을 노골화하니, 이때 송왕宋王에 책봉되어 그 본부 수양壽陽에 주둔 중이던 유유는 신하들을 불러다가 주연을 베풀고는 이렇게 운을 띄웠으니
"환현이 찬위篡位하면서 천명[鼎命]은 이미 옮겨가 버렸소이다. 내가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부르짖고는 제실帝室을 부흥케 하고자 남북으로 다니며 정벌하고 사해四海를 평정하니 공업이 이미 현저히 드러나고 마침내 구석九錫까지 받았소이다. 올해가 되니 점점 몸도 쇠약해졌으나 융숭한 대접이 이와 같으니 만물은 극성을 싫어하니 어찌 오래도록 편안할 수 있겠소이까. 이제 작위를 내어놓고는 경사京師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고자 하오."
「桓玄篡位,鼎命已移。我首唱大義,興復帝室,南征北伐,平定四海,功成業著,遂荷九錫。今年將衰暮,崇極如此,物忌盛,非可久安;今欲奉還爵位,歸老京師。」 (자치통감에서)
더는 오를 데가 없으니 이제는 이 짓은 그만하고 더 늦기 전에 내가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를 만들어 통치하면서 노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서 이 말 속내를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잔치가 파하고 손님들이 돌아갈 무렵 개중 한 명이 뒤늦게 아차! 하고는 도로 궁궐로 들어가 유유를 알현하고는 그 뜻을 받들어 정권 인수작업에 착수하고 마침내 그해 6월 11일, 선양이라는 허울 좋은 형태를 빌려 유송劉宋 왕조를 개창했다.
하지만 그의 비극은 저 앞선 인용문에 보이듯이 너무 늙은 나이에 선양을 받았다는 데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58세. 실제 그는 왕조를 개창한 창업주로는 지나치게 짧은 제위 2년 만인 422년 6월 26일, 향년 60세로 사망하고 만다.
그가 즉위하자 어용 기자들이 달라들었다. 그의 재위 3년째인 영초永初 3년(422) 3월에 보이는 대목이다.
황상이 병이 들자 태위太尉인 장사왕長沙王 유도련劉道憐과 사공司空인 서선지徐羨之와 상서복야尚書僕射인 부량傅亮과 영군장군領軍將軍인 사회謝晦와 호군장군護軍將軍인 단도제檀道濟가 같이 입시하여 의약醫藥을 수발들면서 여러 신하가 청하기를 신기神祇한테 빌어 목숨을 빌어보자 했지만 황상은 허락하지 않고는 오직 시중侍中인 사방명謝方明을 시켜서 종묘宗廟에다가 병이 들었음을 고하도록 했다. 황상은 성정이 기괴奇怪함을 좋아하지 않아 출세 이전에도 (훗날 잘될 것임을 예고하는) 부서符瑞가 많아 귀한 신분[황제 등극을 말함-인용자]에 이르자 사관들이 자신들이 들은 것을 사실인지 물었지만 황상은 거부하면서 대꾸를 하지 않았다.
上不豫,太尉長沙王道憐、司空徐羨之、尚書僕射傅亮、領軍將軍謝晦、護軍將軍檀道濟並入侍醫藥。群臣請祈禱神祇,上不許,唯使侍中謝方明以疾告宗廟而已。上性不信奇怪,微時多符瑞,及貴,史官審以所聞,上拒而不答。
간단히 말해 황제가 등극하면, 특히 새로운 왕조가 개창되면, 그런 황제 등극 혹은 왕조 개창이 필연임을 강조하고자 그에게 옛날 일어난 일들을 미래의 창업을 예고한 일로써 조작하는 일을 하기 마련이라, 부서符瑞란 서징瑞徵이라 상서로운 일을 말하거니와, 간단히 말해 저 구절은
"폐하 주변에서 일어난 신이한 일들을 일러주소서"
라는 요구였으니, 하지만 유유는 본래 성정이 그런 일을 좋아하지 아니해서 그런 일은 거절했다는 의미거니와, 이를 통해 우리는 왜 조선왕조가 개창과 더불어 곧바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고, 대동강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출현했다고 개사기 개뻥을 쳐야 했는지를 해명한다. 아울러 건국신화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생생한 장면을 저처럼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없다.
****
이상은 2016년 2월 12일 글을 보강한 것이니, 강조하고자 하는 대략은 변함이 없다.
***
왜 조선왕조 건국 이데올로그들은 하고 많은 부서 중에 고구려를 들고 나오고 평양을 들고 나왔을까? 천문을 들고 나온 이유야 천명天命을 팔아먹는 일이었으니 충분히 이해 가능하나, 왜 하필 고구려와 평양인가? 이는 아무래도 조선왕조가 대체하는 전 왕조가 고려라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해서 국호를 고려라 했다. 그런 고려 왕조 천명이 조선으로 넘어갔다는 상징조작이 평양 대동강, 그리고 고구려 유물로 등장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다.
'New Reading of History and Histor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기 世記 혹은 世紀가 탑재한 폭발성 (0) | 2022.03.18 |
---|---|
역사조작은 이세민 이성계처럼 (0) | 2021.01.27 |
유득공이 소개한 영길리국과 두목관 마알이니·시당동 (0) | 2021.01.24 |
조선시대 삥땅의 요람 광흥창과 군자감[兩倉] (0) | 2021.01.24 |
용수龍壽-용춘龍春이 다른 사람인 빼도박도 못할 근거 (0) | 2020.12.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