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Who'sWho in Ancient Korea986 배소(陪昭)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은 이름이 흥광(興光)인데 본명은 륭기(隆基)이다. 효소(孝昭)의 모제(母弟)다. 선비(先妃)는 배소왕후(陪昭王后)이니, 시호가 엄정(嚴貞)으로 원대(元大) (아간) 딸이다. 후비(後妃)는 점물왕후(占勿王后)이니 시호는 소덕(炤德)이니 순원(順元) 각간(角干)의 딸이다. 임인년에 즉위해 35년을 다스렸다. 능은 동촌(東村) 남쪽에 있으니 양장곡(楊長谷)이라고도 한다. 2018. 3. 7. 김운(金運) 김흠운의 잘못된 표기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은 김씨다.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자(字)는 일소(日炤)이다. 아버지는 문호왕(文虎王)이고 어머니는 자눌왕후(慈訥王后)이다. 비는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니 김운공(金運公)의 딸이다. 신사년에 즉위해 11년을 다스렸다. ☞김흠운 2018. 3. 7. 김흠운(金欽運) 김흠운(金歆運)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서는 김운(金運)이라고 표기돼 있는데 이는 金欽運 혹은 金歆運에서 중간 글자가 탈락된 데서 빚어진 결락으로 판단된다. 두 표기가 같은 인물이라면, 그는 나밀왕 8세손으로 아버지는 잡찬 달복이다. 어려서 화랑 문노의 유파에서 심신을 수련하면서 특히 목숨을 불사하는 군인의 길을 지향했다. 그러다가 영휘(永徽) 6년(무열왕 2년, 655), 조천성(助川城) 전투에 낭당대감(郎幢大監)으로 출전해 백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이를 기려 태종대왕은 일길찬을 추증했다. 죽으면서 남긴 말이 "신라 귀골(貴骨)로 대왕의 반자(半子)"라 했으니, 태종대왕 사위임을 알 수 있지만 부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죽은지 28년 뒤인 신문왕 3년(683.. 2018. 3. 7. 문노(文努) 화랑세기 문노 전 : 8세 문노(文弩)는 비조부공(比助夫公)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加耶國) 문화공주(文華公主)인데 문화공주는 야국왕(野國王)이 바친 여자(貢女)라고 한다. 《호조공기》(好助公記)에는 ‘북국왕녀(北國王女)’라고 되어 있는데, 문노는 스스로 가야가 외조(外祖)라고 말했으니, 북국은 가야의 북국일 것이다. 법흥대제가 가야를 나누어 남․북으로 하면서 이뇌(異腦)는 북국왕(北國王)으로 삼고는 양화공주(兩花公主)를 처로 삼게 하고, 청명(靑明)은 남국왕(南國王)으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때 호조공(好助公)이 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책망했다. 이보다 앞서 찬실은 야국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문화공주는 생각건대 틀림없이 찬실의 딸일.. 2018. 3. 7. 김흠운(金歆運) 생존연대와 이름 표기, 그리고 관위 등을 고려할 때 김흠운(金欽運)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영휘(永徽) 6년(무열왕 2: 655) 태종대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이를 치고자 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郎幢) 대감으로 삼았다. 이에 그는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 2018. 3. 7. 김달복(達福)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열전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2018. 3. 7. 이전 1 ··· 79 80 81 82 83 84 85 ··· 165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