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흑석동산성 성벽·문터·명문기와 발견…"고대사 퍼즐조각"
정윤덕 / 2022-10-30 09:42:12
https://k-odyssey.com/news/newsview.php?ncode=179542051726932
위선 이 흑석동산성이라는 데가 궁금해 검색해 보니 그 위치가 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 산26-1번지라 해서, 그걸 지도에서 두들겨 보니 아래와 같댄다.
삼국시대로 돌아가 보면 지금의 대전이야 빌빌 싸던 곳이라, 그 도읍 공주나 부여를 기점으로 보면 동쪽 옥천 쪽으로 향하는 길목 아닌가 싶은데, 이건 급격한 국토 변화 이전 적어도 조선시대 지도 정도는 봐야 어느 정도 의문을 풀 듯한데, 그걸 지금 이 자리서 궁구할 여유는 없다.
여튼 이 산성은 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 해발 197m 고무래봉 정상을 둘러싸고 성곽을 두른 이른바 퇴뫼식산성인가 본데, 기존 조사에서 그것을 처음 쌓은 주체로는 백제가 확정되다시피 한 모양이라, 성벽 기준 둘레는 470m라 한다.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하고 바깥쪽 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을 채우는 방법으로 성벽을 맹글었댄다.
산성은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두마천이라는 강이 둘러쳤다는데 경사면이 급해 대전에서 연산에 이르는 길목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았다고 짐작된댄다. 그런가?
암튼 이번에 이걸 대전시에서 의뢰해 어느 기관에서 파제낀 모양이라, 왜 팠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멀쩡한 산성 파제낄 적에 매양 들이대는 그 논리를 갖다 댔을 것임은 불문해도 가지다.
아래는 저 보도 토대가 된 대전시 문화관광국 문화유산과 2022. 10. 30 관련 보도자료 전문과 첨부 사진들이다. 아쉽게도 조사단 이름이 보이지 아니한다. 어느 기관에서 조사했단 말인가?
흑석동산성, 감추었던 모습을 드러냈다
- 발굴조사에서 남문지, 명문기와 등 시대를 밝힐 유적․유물 확인돼 -
□ 대전시는 시 기념물 15호인 흑석동산성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과 문지(門地) 그리고 인장(印章) 형태로 새겨진 명문기와 등 흑석동산성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할 주요 유적과 유물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ㅇ 이번 흑석동산성 발굴조사는‘산성의 도시 대전’브랜드를 구축하기 위한 「산성종합정비사업」의 첫 조사로 실시됐다.
ㅇ 흑석동산성은 서구 봉곡동에 위치한 해발 197m의 고무래봉 정상부에 축조된 둘레 약 480m의 테뫼식 산성이다.
ㅇ 산성이 위치한 곳은 두계천과 갑천이 만나는 지점으로 삼면은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 면은 산지에 둘러싸여 있으며, 대전에서 연산, 부여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을 내려다보고 있어 이 곳을 감시할 목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ㅇ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였던 흑석동산성은 『삼국사기』백제본기와 『구당서』 및 『신당서』백제조에 등장하는 나당연합군과 백제군의 격전지로 유명한 진현성으로 추정되며, 또한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의하면 밀암고성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ㅇ 주요 발굴성과로는 우선 성의 남쪽에서 발견된 6m 높이의 백제시대 석축 성벽과 남문지(南門地)가 있는데, 석축에서는 견고함을 더하기 위한 그랭이 기법이 뚜렷했고, 남문지의 경우는 대전 최초로 발굴에 의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부여된다.
ㅇ 북동쪽 성벽 구간에서는 석축과 토축 두 기법이 모두 확인되었는데, 석축 구간은 외벽과 내벽을 모두 돌을 쌓아 만든 협축식으로 축조되었고, 토축은 높이 2m 내외에 판축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확인되었다.
ㅇ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정방형의 인장으로 찍어 새긴 명문기와가 무더기로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백제 사비기의 표지적인 유물로 ‘인장와(印匠瓦)’라 불리는 이 기와에는 ‘存◯ 丙辰瓦’가 새겨져 있는데 ‘丙辰(병진)’은 백제 596년으로 추정된다.
ㅇ 대전시 김연미 문화유산과장은 “흑석동산성의 연대와 조영 주체를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로 대전 고대사의 새로운 퍼즐 조각을 찾아낸 것”이라며 “흑석동산성의 활용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고민하겠다”고 했다.
뭐 또 글자 쪼가리 하나 나왔다고 이짝으로 밥묵고 사는 사람들이 침소봉대하고 난리를 칠 것이 볼 보듯 뻔한데, 제발 저런 글자로 오도방정 떠드는 일은 그만 봤음 싶다.
글자 적힌 기와를 살피면 정방형 인장에다가 무슨 글자를 새겼다 하며, 그런 기와가 제법 많이 나와서 저 보도자료에서는 무더기로 표현한다. 무더기는 언론에서 쓰는 말인데?
이를 백제 사비시대 표지적인 ‘인장와印匠瓦’로, 그에 적힌 글자는 ‘存◯ 丙辰瓦’ 정도가 확인된다 하는데, 글쎄다, 난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걸릴랜다.
이 '丙辰병진’을 백제 596년으로 추정한다는데 그럴까?
***
일찌감치 써 뒀지만 공개를 까먹고 있다가 뒤늦게 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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