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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내가 보는 위만조선과 낙랑》(2) 내가 광동성으로 간 까닭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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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광동성 광주로 남월국 유적 답사를 가기는 2007년 무렵이 아닌가 하는데 자료를 찾아봐야겠다. 내가 이곳을 찾은 까닭은 그 직전 요서 지역 탐방에서 감발한 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양에서 출발해 오한기 적봉을 거쳐 산해관에 이른 이때 탐방에서 나는 말로만 듣던 진황도와 인근 수중현 일대 소위 진·한秦漢 시대 진시황·한무제 시대 행궁行宮 유지를 둘러봤다.

금산취며 흑산두 일대에서 중국 고고학이 찾았다는 이들 행궁 유적을 보니 내가 놀란 점은 첫째, 그들 행궁이 조영·운영된 시기가 위만조선과 거의 겹치고, 둘째 그 위상이 행궁이라는 말에 어울리게끔 높았으며,

셋째 유구·유적이 소위 현지의 토속미를 풍기기는 했지만 완연한 진·한의 소위 중국풍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넷째 이런 것들이 떼를 이룬 구역을 지도를 쳐서 보니 완연히 왕경王京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나름대로는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들 유적과 그 출토 유물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위만조선 혹은 낙랑군 평양설을 의심하게 되었다.
 

광동성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병기 이래 중국 역사고고학계에서는 이들 유적을 진시황 혹은 한 무제의 행궁이라 말했지만, 남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나는 진시황 혹은 한 무제 시대는 여느 중국사학도 못지 않은 전문가를 자임하는 까닭에 사기 한서를 필두로 하는 이 시대를 증언하는 문헌은 거의 모조리, 빠짐없이 소화한 터라, 이런 내가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도 진 시황제나 한 무제가 지금의 산해관 이동以東으로 행차한 기억이 없었다. 

사기 봉선서를 보면 그럴 만한 흔적을 보이기는 하지만, 설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단 한 차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귀국 뒤에 곧바로 관련 문헌들을 다시금 샅샅이 뒤졌다.

그 결과 중국 학계가 말하는 행궁설은 개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말한다. 저들 행궁지는 시황제 혹은 한무제와는 눈꼽만큼도 상관없었다.
 

지금의 광주

 
둘째, 저들 ‘왕경’에 버금가는 유적이 출현한 곳이 실로 공교롭게도 소위 일부 재야사학도 혹은 그렇게 분류되는 사람들이 말하는 위만조선 혹은 그 중심지라는 왕검성(왕험성) 위치 중 한 곳이었다.

내 기억에는 아마도 북한의 리지린, 그리고 남한의 윤내현이 이런 주장, 혹은 엇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고 기억하거니와, 그들과는 상관없이, 내가 관련 기록들을 검토해도 하북성을 남북으로 관통해 발해만에 이르는 난하 유역 이동 지역이 위만조선일 수도 있었다.

내가 직후 광동성 광주를 향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간단하다.

광주 일대에 남월국 유적이 잔뜩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남월국과 실상은 똑같은 길을 걸은 위만조선을 남월국에서 찾을 수 있다는 확신 혹은 환상 비슷한 것이 들었다.

가서 보자. 거기 가서 도대체 남월국 문화가 어떤지 보자.
 

남해신사

 
이에서 내가 주목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들 중 하나가 남월국 문화에 장안과 낙양이 대표하는 중원 문화가 얼마만큼 침투했으며, 그것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느냐였다.

그래서 무작정 광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May 30, 2016) 

 

*** previous article *** 

 

《내가 보는 위만조선과 낙랑》(1) 남월국은 위만조선의 투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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