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한반도는 사생결단하는 전쟁의 시대였다. 삼국이 서로, 혹은 밀착하고선 그 외부 세계까지 끌어들여 어느 하나를 종말하고자 하는 시대였으며, 그 궁극하는 귀결이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백제 함몰이 있기 전 신라는 고구려와 대판하는 전쟁에 돌입하곤 했으니, 7세기 전반기 낭비 대전娘臂大戰은 개중에서도 양국이 전력을 투입한 총력전이었다.
이 전쟁은 신라에 의한 도발이었다. 즉위 50주년을 몇 년 앞둔 건복建福 46년, 서기 629년 스산한 가을 기운이 한반도를 감돌기 시작한 그해 8월, 이 작전을 치밀하게 준비한 신라왕 김진평은 마침내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발동한다.
신라가 이 전쟁을 어찌 생각했는지는 그 화려한 수뇌부 진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총사령관에는 이찬 임말리任末里를 두고, 소판 대인大因과 서현舒玄, 파진찬 용춘龍春과 백룡白龍이 임말리 보좌진으로 포진했다. 사령부인 중군은 임말리가 직접 이끄는 가운데 부사령관들인 저들이 각각 예하 부대를 이끌었다.
이들의 공격 목표는 낭비성娘臂城이었다. 이 낭비성이 현재의 어디인지 알 수가 없으나, 단 하나는 분명했다. 신라와의 변경에서는 가까운 어느 지점, 그러니 고구려로 보면 남방의 상징과도 같은 대도회였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의 강원도 북부 어느 지점, 혹은 황해도 어드메쯤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신라는 왜 이곳을 타격했을까? 그곳이 언제나 신라를 위협하는 고구려의 요해처요, 그를 위한 군수기지 사령부가 있던 곳인 까닭이다. 그래서 이곳을 신라를 쳐서 반드시 함몰해야 했다.
그런 까닭에 낭비는 산에 의지한 데가 아니었으니, 물산이 쉽게 모이는 교통의 요해요, 평지 거성이었다. 이곳을 신라가 들이친 것이다.
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신라가 낭비를 친다는 정보는 샜다. 하긴 그렇게 대군을 움직이는데 어찌 그런 정보가 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계림엔 고구려 간첩이 득시글했으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 영류왕 또한 철저한 대비를 위해 방어군을 소집하고는 대군을 낭비에 보내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나라 대군은 낭비성을 두고 일대 공방전을 치렀다. 전력이 비슷하다 생각했음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나라 군대는 평지에서 양쪽에서 진영을 짜고 참호를 판 상태에서 붙었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낭비 그 자체는 방어력이 없는 성임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고구려군은 틀림없이 신라군이 북상하는 통로를 막았을 것이다.
이런 때 보통 방어하는 쪽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공격하는 쪽에서는 쪽수로 봐도 수비군에 견주어 세 배는 많아야 했다. 왜 그런 말 있지 아니한가? 똥개도 제 집 안마당에서는 50프로를 먹고 들어간다고 말이다.
이 낭비대전 역시 딱 그런 양상으로 전개됐다. 이 대목 김유신 열전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 고구려인들이 병사를 내어 맞받아치자 우리 편이 불리해져 전사자가 매우 많았고 사기도 꺾여서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패배의 전운이 감돌던 신라군 사령부 막사를 박차고 서른다섯살 영관급 장교가 들어서 투구를 벗고는 임말리를 면담하고는 이리 말한다. 이 대목을 김유신 열전은 아버지한테 했다고 하나 나는 그 상대는 임말리였다고 본다.
“우리 군사가 졌습니다. 저는 평생 충효를 다하기로 결심했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감히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듣건대, ‘옷깃을 들면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 했습니다. 제가 마땅히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시대는 바뀌어 신라는 노땅들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팡파르가 울리고 있었다.
말을 마치고 그는 예하 특공대 몇 명을 이끌고는 곧바로 말에 올라 칼을 뽑아 들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들이쳤다. 요란한 칼부림이 번쩍번쩍하고 말들이 일으키는 먼지만 자욱한 순간, 적진을 뚫고 나온 그의 칼머리엔 적장의 목이 걸려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임말리는 알았다. 이때를 놓치면 우리가 죽는다. 돌진하라!
와 하는 함성과 더불어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고구려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낭비성 남문엔 신라기가 펄럭였다.
전쟁은 참혹했다. 고구려군은 5천명이 전사해 들판을 피로 물들였으며 1천 명이 포로가 됐다. 그보다 많은 숫자는 도망쳤고 성안에 있던 주민들은 고스란히 신라 호적에 편입됐다.
계림에선 대대적인 환영 페레이드가 열렸다. 이날은 대관식이었다.
누구의 대관식이었는가?
신라는 이제 김유신의 시대였다. 중당당주 김유신이 이제 신라의 주역으로 떠올랐으며, 이제 그의 아비 김서현을 필두로 퇴물들은 퇴장을 고하는 쓸쓸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 대관식을 몹시도 쓰리게 바라본 사람이 있었다. 이 대목을 화랑세기 그의 열전은 이렇게 증언한다.
“公이 분연히 말했다. ‘나한테 이런 빈 그릇만 지키게 하니 장차 무엇에 쓴단 말인가? 나도 이제는 (전쟁터로) 나갈 것이다.’”
형보다 세 살 적은 서른두살 김흠순은 이렇게 해서 밖으로만 싸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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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난 형을 둔 흠순欽純 (1) 형을 찾아가 조언을 구한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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